<중국 베이징시 북서쪽 하이뎬구에 위치한 황실원림. 총면적 2.9 km²에 달하며 베이징에서 현존하는 황실원림 중 건축규모가 제일 크고 비교적 온전하게 보전되었다. 중국 고전원림의 본보기이기도 한 이화원은 높이 60m인 만수산(萬壽山)과 면적 2.2 km²인 쿤밍호(昆明湖)가 있다. 중국 국가 AAAAA급 명승지로 지정되었다.> --나무위키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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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궁문(東宮門)
이화원의 정문으로 앞에는 1쌍의 청동사자가 놓여 있고 문에는 3개의 통행용 출입구가 있는데, 황제나 황후가 출입하던 가운데 문은 어로문(御路門)이라고 불렸다. 문 위에 걸린 '이화원' 세 글자의 편액은 광서제의 친필이다. 동궁문 북쪽에는 후비들이 거주하던 동8소(東八所)가 있었다. |
인수전(仁壽殿)
1750년(건륭 15)에 지어질 때는 근정전(勤政殿)이었다가 광서제 때 재건하면서 인수전으로 개칭했으며, 동향으로 된 정면 9칸의 전각이다. 서태후와 광서제는 이곳에서 정무를 돌보며 외국 사절과 그들의 부인을 접견했다. 인수전 앞에는 건륭제 때 청동으로 주조한 봉황, 용, 항아리, 향로가 놓여 있는데, 중국 고대의 예제에 따르면 용은 제왕을 상징하므로 가운데에 놓여야 하지만,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부터는 용을 밀어내고 봉황을 가운데에 놓아 황제보다 우월한 서태후의 권력을 과시했다. 인수전 북쪽에는 연년정(延年井)이라는 이름의 우물이 있다.
만수산은 원래 이름은 옹산(瓮山)인데, 베이징 서산(西山)의 지맥으로 처음에는 높이가 60 m도 안 되는 작은 언덕이었다. 옥천산(玉泉山)의 샘물이 흘러내려 옹산 앞에서 호수를 이루었는데, 이 호수가 당시 금나라의 수도인 중도(中都) 서쪽에 위치해 있어 서호(西湖)라고 불렀다. 1153년 금나라 해릉양왕이 이곳 산기슭에 행궁을 짓기 시작했고, 원나라 쿠빌라이 칸은 대도(大都)로 천도하면서 대운하를 통한 조운을 원활히 하고 궁중의 용수를 확보할 목적으로, 1262년과 1290년 두 차례에 걸쳐 도수감 곽수경에게 명해 옥천산의 샘물을 옹산 기슭에 막아 물을 끌어들여 서호를 준설 확대해 수역을 크게 늘리도록 했다. 이때 서호에서 파낸 흙은 옹산에 쌓아놓게 해 원래보다 크게 높아졌다. --나무위키에서 펌--
장랑(長廊)
건륭제가 어머니 효성헌황후의 산책을 돕기 위해 만든, 낙수당 서원(西院)에서 시작해 석장정(石丈亭)에서 끝나는 길이 728 m, 273칸짜리 길다란 회랑. 4계절을 상징하는 유가정(留佳亭)·기란정(寄瀾亭)·추수정(秋水亭)·청요정(清遙亭) 등 4개 정자가 부속되었다. 장랑의 들보에는 1만 4천여 폭 소식채화(蘇式彩畵)로 된 그림이 있는데, 항저우 서호의 풍경을 비롯해 꽃·나무·곤충·새·산수, <서유기>·<삼국지연의>·<수호전>·<봉신연의>·<요재지이> 등의 고전소설과 같은 다양한 소재가 그려졌다.
이화원이 본격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건륭제의 치세 때였다. 1750년(건륭 15) 건륭제는 생모 효성헌황후의 환갑을 기념해 이화원의 전신인 청의원(淸漪園)을 조영하도록 명령하고, 홍치제가 지었던 원정사 터에는 대보은연수사(大報恩延壽寺)를 세우도록 했으며, 이듬해(1751) 옹산을 만수산, 서호를 곤명호라 개칭했다. 청의원은 은자 480만 냥을 쏟아 부어 공사한 끝에 1764년 완공되었다. 청의원 내에는 '바다에는 신선이 사는 봉래산(蓬萊山)·방장산(方丈山)·영주산(瀛洲山)의 세 산이 있다'는 중국 신화를 바탕으로 곤명호 위에 남호도(南湖島), 단성도(團城島), 조감당도(藻鑒堂島)를 만들었고, 강남의 풍경과 원림을 좋아한 건륭제의 취향에 맞춰 항저우의 서호를 위시해 강남 지역의 내로라하는 경승지를 모방해 이곳에 재현했다.
이로써 청나라의 황실원림으로 유명한 '3산 5원', 즉 창춘원(暢春園)·원명원(圓明園)·향산(香山) 정의원(靜宜園)·옥천산(玉泉山) 정명원(靜明園)·만수산(萬壽山) 청의원(淸漪園)을 형성해 장관을 연출했으나 도광제 때 이후 청나라의 국력이 약해지고 재정이 쪼들리면서 유지에 어려움을 겪다가 1860년(함풍 10) 제2차 아편전쟁 때 영불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해 3산 5원을 불태우고 진귀한 보물을 약탈해 청의원의 목조 건축은 전소되어 폐허로 변했다. 하지만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면서 해군 경비를 유용[4], 청의원의 중건을 개시해 1884년(광서 10)부터 1895년(광서 21)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고 '이양충화(頤養衝和)'의 뜻을 취해 청의원에서 이화원이라 개칭했다.
1912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지자 이화원은 황실의 사유재산으로 남았다가 1924년 선통제가 자금성에서 쫓겨나면서 북평시가 접수해 공원으로 일반에 개방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한 후 1951년부터 수차에 걸친 자금조달과 보수공사를 통해 원내의 대부분의 전각과 정원이 전성기의 모습을 회복했다. 1961년 국무원은 이화원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했고 이후 문화대혁명 시기에 불향각 내부가 홍위병들에게 훼손이 되는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이화원 자체는 무사했다. 이 때 훼손된 문화재도 이후 복원되었고 199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보도에 부채 모양의 문양을 만들었다.
창의 모양이 독특하다. 오각형, 육각형, 팔각형...
중국 관광객들은 붉은 깃발을 든 가이드를 따라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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