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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중국여행

1. 북경 자금성

2007년 12월 중국 여행을 하기로 했다.

크리스마스 연휴를 이용하여 다녀오기로 했다.

 북경에 도착하여 처음 찍은 사진이다. 한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음식점에서 식사 후 사진을 찍었다.

 북경에 위치한 Microsoft. 현대자동차와 대한항공 사무실도 입주해 있다.

 마치 60년대 시골을 회상하게 해 주는 듯한 거리의 풍경이 낯설지 않다.

왼편으로 자금성이 펼쳐져 있다. 즉 이곳은 성 밖의 거리모습이다. 우리로 치자면 경복궁 옆 '종로구 내자동' 정도가 될 것 같다.

 버스 정류장.

자금성을 에워 싸고 있는 50미터 너비의 해자다.

 10m에 이르는 높은 성벽과 50m 너비의 거대한 해자로 에워 싸인 자금성. 자금성은 명·청 때 500여 년간 24명의 황제가 살았던 궁전이다.

 여기는 자금성의 후문인 신무문이다. 황제와 황후가 성 밖으로 행차를 할때 이용했다고 하는데, 현판에는 故宮博物院이라 적혀 있다. 그 이유를 살펴보니,

자금성은 1949 중국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뒤에야 비로소 일반에 공개됐다. 과거의 궁전이라는 뜻에서 공식 명칭은 고궁이 되었다. 왕조는 사라졌지만 해마다 600~800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자금성은 여전히 중국 문화의 중심으로 위용을 떨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천안문광장이 있는-자금성의 정문인 오문으로 들어가서, 후문인 신무문으로 나오는데, 우리는 인파를 거슬러 신무문으로 들어가 오문으로 나가기로 했다.

 50미터 너비의 해자인 호성하(護城河). 호성하의 물은 방위상의 목적은 물론이고 자금성 안을 감돌아 흐르며 방화용 기능도 한다고 하는데, 가운데 서서 보니 그 규모가 실감이 난다. 앙코르와트 해자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앞에 보이는 산이 '경산공원'. 왼편에 있는 북해공원의 호수를 파낸 흙을 쌓아올려 만든 인공 산이란다.

 중국사람들은 '꾸궁'으로 발음하던 故宮. 한문 뜻은 예고 집궁 - '예스런 집'이다.

 자 이제 자금성을 구경하러 들어가 보자.

 어화원 -  중국 베이징[北京]의 자금성 내 네이중루[中路]에 위치한 정원 

자금성(紫禁城) 중심축에 있으며, 곤녕궁(坤宁)의 뒤쪽에 있다. 명대(明代)에는 궁후원(后苑)”라고 하였다가, 청대(淸代)에 어화원(御花)으로 개칭하였다. ()의 영락() 18(1420)에 조성되었고, 기본 구조를 유지하면서 여러 차례 증축을 하였다. 규모는 남북의 길이가 80m, 동서의 폭이 140m, 대지면적은 12,000㎡이다. 원내의 중심 건축물인 흠안전(安殿)을 중심으로 하여 전방과 양쪽에 정자와 누각이 늘어서 있다. 이곳에는 소나무와 측백나무, 대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양성제(養性齊) 앞에는 기기묘묘한 돌을 특이한 형태로 쌓아 올린 가산(假山)이 있고 일명 퇴수산(堆秀山)이라고 부르는 어경정(御景亭)에서는 황후와 황제가 북경 시내를 보며 경치를 즐겼다 한다.

 

 이 곳에는 각지로부터 모아온 자연이 만들어 낸 진기한 형태의 돌들이 가득하고 어화원 문안에 있는 향나무는, 뿌리는 두 나무이지만 윗 부분에서 붙어 한 나무가 된 것으로 부부금실을 상징하는 나무라 하여 기념촬영 하는 부부들이 많았다.

 자금성을 가득 메운 자색은 기쁨과 행복을 상징하는 빛깔이며, 동시에 우주의 중심인 북극성을 상징한다. 북극성은 하늘의 궁전이 있는 곳. 하늘의 아들 즉 천자인 황제가 사는 궁전 역시 그 하늘을 상징하는 자색으로 지었다. 남과 북의 긴 축 위에 놓인 자금성의 건축물들은 모두 남향이다. 이는 남쪽의 양기를 받고 북쪽의 바람과 음기로부터 황궁을 보호하려는 의도다.

 자금성은 명·청 때 500여 년간 24명의 황제가 살았던 궁전이다. 명나라의 3대 황제 영락제는 권좌에 오른 지 4년째 되던 1406년 수도를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기고 만리장성 이후 중국 최대의 역사라 불리는 자금성 쌓기에 나섰다. 이후 14년간 100만 명의 인부가 이 공사에 동원됐다. 사용된 건축 자재의 양도 상상을 초월해 벽돌 1억만 개와 기와 2억만 개가 사용됐다. 기둥에 쓰일 나무는 사천지방에서 조달된 것으로 운송에만 4년이 걸렸다. 전각의 받침대와 부조에 쓰인 돌은 50km 떨어진 채석장에서 날랐다. 돌은 하나의 무게가 200톤에 달하는 것도 있었다. 당시 부역자들은 겨울철 길에 물을 뿌려 빙판을 만든 뒤 돌들을 날랐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완성된 자금성에는 황제 일가를 위해서 9천 명의 시녀와 1천 명의 내시도 함께 살았다.

 서태후 - 

함풍제의 사후 동치제가 6세에 즉위하자, 공친왕()과 공모하여 쿠데타로 반대파를 일소하고 모후()로서 동태후(: 함풍제의 황후로 라고도 한다)와 함께 섭정이 되었다. 1875년 동치제가 죽자, 누이동생의 3세의 아들을 옹립, 광서제()로 즉위시켜 자신은 섭정이 되었다. 광서제가 16세가 되자 친정이 시작되었으나, 국정의 실권은 서태후가 쥐고 있었다.

1898년 광서제가 이를 싫어하여 입헌파 캉유웨이[]에 접근, 신정을 실시[]하여 입헌군주제를 위한 전환을 꾀하자, 서태후는 보수파 관료를 부추겨 쿠데타를 감행, 신정을 100일로 종식시키고 광서제를 유폐하는 무술정변()을 일으켰다. 의화단()의 반()제국주의 투쟁이 고조되자, 이를 이용하여 열강에 대해 선전을 포고하였으나, 8개국 연합군의 침입을 받아 시안[西: 西]으로 피신하였다.

모든 진보적 개혁에 반대하던 서태후도 베이징[] 귀환 후에는 입헌 준비, 실업(), 교육의 진흥 등 신정을 실시하였으나 대외적으로는 배외정책에서 굴욕적 외교로 전락하여, 중국의 반식민지화는 더욱 심각해졌다. 청왕조의 권위 실추와 함께 혁명운동·입헌운동이 고조되는 가운데 광서제가 죽은 하루 뒤에 죽었다. -두산백과 참조-

 지붕을 장식하고 있는 기와와 동물의 모습이 우리와는 다르다.

 자금성내의 유일한 무료 화장실이라나?

무슨 의미인지 짐작이 가시는지?

"앞으로 작은 걸음 내 딛으면, 문명은 크게 진보한다"

남자 화장실에 써 있던 말인데 너무 거창하다. 우리 화장실에는 이렇게 씌여있다.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니다.'

 7성급 호텔. 이런 말은 들어봤는데, 4성급 화장실은 처음 봤다. 재미있다.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느 건물 천장에 새겨져 있던 봉황 조각과 그림.

이렇게 사방으로 열린 문으로 들어와 스쳐 지나면 보지 못할 그림이다.

눈을 들어 천장을 보라.

 내궁으로 가 보자.

교태전(交泰殿)은 내관들의 알현을 받는 곳으로 청대에는 황제의 옥새를 보관하였다 한다.
교태전 앞 동쪽에 있는 물항아리(滴漏)와 구리로 만든 물통(銅壺)는 물시계이고 교태전 뒤의 곤녕궁(坤寧宮)은 명대에 황후가 거쳐 하던 중궁이었지만 청대에는 동난각(東暖閣)이라고 부르는 동 측은 황제의 신혼 침실, 중간과 서 측은 궁중에서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쓰였다.
이 곳에는 17, 18세기 세계 각국의 시계가 전시되어 있는데 이 곳의 자명종 시계는 크기도 대단히 크지만 현재까지 정확한 시간을 알리고 있다고 한다.

 <正大光明>이라는 편액, 순치제가 친필로 썼다고 한다.

 건청궁(乾淸宮)은 황제의 침실이며 일상 업무를 처리하던 곳이다.
내부의 중앙에는 황제가 앉는 보좌가 있고 그 뒤에는 용을 조각하고 금박장식을 한 병풍이 있으며 칠보학, 향로도 있다.

 여기를 지나면 내궁으로 들어가게 된다.

 청동으로 만든 사자 한 쌍이 문 앞 양쪽에 서 있다.
동쪽의 숫사자는 권력과 천하통일을 상징하며 서쪽의 암사자는 왼발로 어린 사자를 쓰다듬고 있는데 자손들의 번성을 상징한다.

 땅 밑으로는 외부 자객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40여장 두께의 벽돌을 깔았다고 한다.

보화전 뒤쪽 계단의 중앙에 있는 대석주주(大石周住)라고 불리는 조각상.
아홉 마리의 용이 구름을 타고 노는 그림이 새겨져 있고 그 무게가 250톤이나 나가는 한 덩어리의 돌로 궁내 최대의 석조이다.  이 돌 조각 앞의 광장은 외조와 내정의 경계선으로 오른쪽으로 가면 아홉 마리의 용이 구름과 바다를 배경으로 꿈틀거리는 모습의 채색 벽화로 유명한 구룡벽(九龍壁)과 각국의 고시계(古時計)를 전시해 놓은 종표관(鐘表館), 황실에서 쓰던 귀한 물건을 전시한 진보관(珍寶館)등이 있는데

여기서 저 위쪽 끝까지 한 덩어리의 돌이란다.

조각하다가 잘못해서 한 귀퉁이가 깨지기라도 했으면 어떻게 했을까?

 자금성은 저녁무렵 석양을 받아 자색이 그 붉음을 더할때 가장 아름다울 것 같다.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3층 기단 위에 지어진 태화전은 전체 높이가 35m에 달하는 중국 최대 목조 건축으로 지붕은 튼튼한 황색 유리 기와로 덮여 있고 외관과 내부가 모두 선명한 극채색으로 칠해져 있다.
태화전이 올라앉은 3층 기단만 해도 정교한 조각이 새겨진 1천4백88개의 기둥이 둘러 서 있고 단 아래에는 1천1백42개의 용머리 조각 배수구가 있는데 비가 올 때면 천여 마리나 되는 용의 입에서 일제히 물을 토해내는 광경이 장관이라 한다.

자금성은 철통 같은 보안으로 황제를 지켰다. 바닥에는 걸을 때 경쾌한 발소리를 내는 특별한 벽돌이 깔려 있다. 이 벽돌의 효과는 음향만은 아니었다. 땅 밑에서 뚫고 올라올지 모를 침입자를 막기 위해 40여 장의 벽돌을 겹쳐 쌓았다. 성 내에는 후원을 제외하고는 나무가 전혀 없다. 암살자가 나무에 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천자의 거처지만 어쩌면 금으로 둘러 싸인 감옥이었는지도 모른다.

성 내부는 정무 처리를 위한 구역(외조)과 황제의 주거 구역(내정)으로 크게 나뉜다. 남쪽에 있는 외조는 자금성의 정문인 오문에서 시작된다. 북쪽 방향으로 태화문·태화전·중화전·보화전이 한 줄로 늘어서 있고, 그 동서에 문화전·무영전 등의 전각(殿閣)이 있다. 높이 35m, 면적 2377㎡의 웅장한 태화전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당나라 때에는 주요 의식이 치러지던 곳이다. 태화전의 앞마당에는 병사 9만 명이 모일 수 있는 넓은 뜰이 있다. 외조의 북쪽으로 내정이 펼쳐진다. 내정의 주요 건축물로는 건청궁·교태전·곤녕궁 등이 있다.

 오문과 내금수교가 보인다.

 크기로 제압하려는 중국다운 자금성의 오문.

 옛날에는 북()을 자(), ()을 오()라고 하였다. 오문() 자금성 중심축 남쪽에 위치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영락() 18(1420)에 축조되었고, ()의 순치(順治) 4(1647)에 중건되었으며 가경() 6(1801)에 보수를 마쳤다.

 문 안으로 들어서면 그 규모와 높이에 경악한다.

 천안문 광장에서 바라 본 모습.

 넓은 천안문 광장. 하지만 너무 삭막했다. 예전 여의도에 있던 5.16광장처럼...

프랑스나 독일인이었으면 아름다운 정원과 조각으로 꾸며 놓았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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