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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이성일, 브람스 평전

1부. 브람스 가계의 배경

* 브람스가 태어난 곳 -    브람스가 태어난 곳은 북독일의 커다란 항구 도시 함부르크다. 봄은 늦게 찾아오고, 대신 여름이 시원한 땅이다. 하지만 선선한 여름이 지나가면 북유럽 특유의 스산한 가을을 맞이하게 된다. 유럽의 많은 국가들이 강력한 난류인 북대서양 해류와 편서풍의 영향을 받아 그리 쌀쌀하게 느껴지지 않지만, 함부르크의 늦가을과 겨울은 어쩐지 음산하고 춥다. 11월을 지나 본격적인 겨울로 접어들면 함부르크는 일조량이 급감한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태양은 좀처럼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기껏 내밀었다가도 변덕을 부리고 아예 모습을 감춰버린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것이 독일 함부르크의 하늘이다.                                                                                                                                                                                      함부르크는 안개가 잦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알스터 호수를 병참기지 삼아 내뿜는 안개가 마을 전체를 휘감아 돌면, 마을은 마치 방역 차량이 지나간 것처럼 안개바다가 되어버린다. 그런 때에 항구에서 뱃고동이 "뿌우"하고 울려 메아리치면 그 은은한 소리에 짐짓 우울감이 감돈다. 처음 겪는 사람들은 자욱한 안개를 헤치며 요정들이라도 출몰할 것 같은 환상적인 분위기를 좋아할지 모르지만, 음습한 날씨를 허구한 날  겪어야 하는 그곳 사람들은 그런 풍경에서 낭만을 잊은 지 오래다. 종일 잿빛 하늘 아래 흐릿한 풍경속에서 생활하다보면 늘 가라앉고 우울해지기 십상이다. 

* 브람스의 음악  -    브람스의 음악은 그가 어린 시절부터 경험했던 북구의 날씨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 맛을 제대로 느끼기 어려운 예술이기도 하다. 날씨는 인간의 사고나 정서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날씨 덕분에 독일에서 철학이 발달했을거라는 말이 있는데, 일리가 있다. 음악은 철학보다 더 예민하다. 그런 환경에서 태어난 모든 것들은 대개 우울증을 호소할 것이다. 선율조차도! 그래서 브람스의 음악도 그러하다.                                                                                                                 브람스의 음악은 그가 태어나고 자란 함부르크의 기후와 무관하지 않다. 브람스는 함부르크에서 태어나 거의 30년간이나 그런 북독일 자연환경의 기운을 받으면서 자랐다. 함부르크의 기후는 브람스의 타고난 기질에 독특한 특징을 갖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브람스의 기질은 이렇게 태어나면서 부터 길러진 것이기도 하지만 물려받은 면도 적지 않다. 그는 함부르크에서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부모가 모두 북독일 사람이다. 그리고 그의 먼 조상들 역시 북독일과 아주 오랜 세월동안 연관을 맺어왔다. 즉 그는 혈연과 지연 양면에서 전형적인 북독일 사람이었던 것이다. 비록 그의 30대 이후 후반 생이 명랑하고 화려한 도시 빈에서 펼쳐졌지만, 그의 정신과 육체는 여전히 수백 년 동안 혈연과 지연에서 획득한 북독일 기질의 특성을 벗어 버리지 못했다. 

* 어머니  -    브람스의 어머니 요하나 헨리카 크리스티아네 니센은 1789년 함부르크에서 태어나 평생동안 그곳을 벗어나지 않은 함부르크 토박이다. 크리스티아네의 선조들은 교사, 목사, 시의원 등의 직업을 갖고 살았다. 그들 중 몇 명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소귀족이기도 했다. 브람스의 어머니쪽 혈통은 꽤 고귀했음에 틀림없다.                                                        어머니 크리스티아네는 특별히 음악에 자질이 있던 사람은 아니었다. 브람스의 재능은 순전히 그의 아버지로부터 온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푸른 눈이 매력적이기는 했지만, 평범한 외모에다 키도 작고 또 한쪽 다리가 짧은 신체적 결함까지 가지고 있었다. 혼기를 훌쩍 넘겼는데도 가정을 꾸리지 못하고 가게를 운영하거나 방을 세 놓으며 살던 그녀는, 비록 변변한 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브람스에게 쓴 편지만 봐도 짐작할 수 있듯이, 글을 충분히 쓸 수 있었고 총명하고 현명하고 가정적인 여성이었다. 가난한 형편에도 가정을 행복하게 꾸려가려고 헌신의 노력을 기울였던 어머니의 모습을 브람스는 늘 기억하고 살았고, 죽는 날까지 어머니를 존경하고 자랑스러워했다. 브람스의 성격 중에 정신적 내용의 깊이와 관련된 측면은 어머니의 성향을 상당 부분 이어받은 것으로 보인다.

* 아버지  -    브람스의 아버지 요한 야코프 브람스의 선조들은 엘베 강 어귀 북쪽 디트마르슈엔 지방에서 살았다. 할아버지는 디트마르슈엔 지방에서 여관과 식료품 가게를 운영했다. 부친 요한 야코프에게는 나이가 열 네살이나 많은 형 페터 회프트힌리히가 있는데, 형은 스무살에 일찌감치 결혼해 부모의 뜻에 따라 가업인 여관 운영을 하며 안정된 생활을 해 나갔다. 그런데 부친 요한 야코프는 형과는 많이 달랐다. 워낙 가풍에 가까운 가문의 내력 덕에 현실 생활에 대한 관심은 적지 않았으나, 틀에 박힌 삶을 싫어하고 방랑벽이 있는데다 비현실적인 꿈이 컸던 일종의 몽상가였다. 그는 북독일 황야를 쏘다니는 것을 좋아했고, 집안 분위기와는 달리 음악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실제로 요한 야코프는 특별한 음악적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요한 야코프는 고향 땅 하이데를 전전하며 악기를 배우다가 당시 옛 슈타트파이퍼 길드를 이끌었던 무지쿠스 Musikus, 즉 공인된 연주가였던 테오도어 뮐러를 찾아가 그의 가르침으로 최종 수업을 마쳤다. 요한 야코프가 받은 음악 공부 과정은 이른바 중세의 도제식 교육이었다. 스승 뮐러의 집에 거주하며 집안 일도 거들면서 요한 야코프는 뮐러의 가르침을 속속 전수받았다. 1826년 12월 16일 19세 청년 요한 야코프는 드디어 뮐러로부터 도제과정 수료 증명서를 받았다.  요한 야코프가 마쳤다는 도제 수업은 악기 연주 훈련이었다. 수료증에 적시하고 있듯이 요한 야코프는 하이데의 슈타트 무지쿠스와 3년, 그리고 뮐러와 2년, 도합 5년 동안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그렇게 매진한 결과 그는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플루트, 플뤼겔호른, 콘트라베이스 등의 악기를 완전히 마스터했다. 이제 그에게는 명실상부하게 무지쿠스로 활동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고, 축제나 무도회, 결혼식 등 각종 의식이나 행사에 초대되어 마음껏 연주하며 살 수 있게 되었다.                                  요한 야코프는 함부르크에 와서 생활한 지 5년정도가 지난 무렵인 1830년에 드디어 함부르크 시민으로 등록되었다. 하지만 생활은 여전히 불안정했고, 연주자 생활로 벌어들이는 수입은 혼자 살아가기에도 넉넉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우연히 함부르크의 크리스티아네라는 어느 중년 여인의 집에 거처를 마련하게 되었다. 요한 야코프는 그 집에 기거한 지 며칠도 되지 않아 그 집 여주인을 찬찬히 살펴보며 깊은 관심을 보이더니 결국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1830년 6월 9일에, 마침내 그 여주인과 결혼식을 올리게 된 것이다. 새로운 출발을 선호하는 결혼식을 주관하기 위해 단상에 오른 함부르크의 목사 알젠은 축복받는 이 한쌍의 남녀가 어쩐지 매우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건장하고 잘 생긴 청년과 신체적으로 균형도 맞지 않고 허약해 보이는 여인의 이상한 결합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당시 요한 야코프는 23살, 신부인 크리스티아네는 41살로 신부가 신랑보다 열일곱 살이나 많았다.  비록 나이 차이가 많은 연상의 여인과 결혼하게 되었지만, 요한 야코프는 당시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부모가 우려한 대로 불안정한 떠돌이 악사의 길을 언제까지 가야할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는데, 결혼을 하면 우선 집세를 내지 않고도 편히 쉴 수 있는 집이라도 생기겠거니 생각했던것이다. 집만이 아니었다. 앞으로 살아갈 생활비도 걱정이었는데, 요한 야코프는 크리스티아네의 생활력을 그 짧은 시간에 다 간파했다. 그녀는 바느질 솜씨도 아주 뛰어났고, 가사도 꼼꼼히 돌봤다. 요한 야코프는 크리스티아네의 그런 가정적인 태도나 생활력이 자신의 연주가 생활을 잘 보조해 줄거라고 믿었다. 당시 그는 크리스티아네를 최소한 아주 훌륭한 삶의 동반자로 여겼다. 그러므로 청혼한 사람은 당연히 요한 야코프였다.

* 브람스의 탄생  -    1833년 5월 7일 화요일 브람스가 태어났다. 부모는 첫째 아들의 이름을 요하네스 Johannes라고 지었다. 그 이름은 아버지(요한 야코프), 어머니(요하나), 그리고 여관을 운영하던 할아버지(요한)까지 공통적으로 갖고 있던 것이었는데, 물론 성서적으로 '요한의 후손'이란 의미다. 브람스는 태어난 지 19일째 되던 날인 5월 26일에 '요하네스'란 이름으로 함부르크의 성 미하엘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  가계명 Brahms  -  Brahms란 가계명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보자.  가계명 Brahms는 북독일에서는그리 어렵지 않게 마주치는 성씨의 하나다. 가령 하노버에서 슐레스비히까지 이르는 지역 주민들 중 Brahms란 성씨를 가진 사람은 흔하다. 원래 브람스의 아버지 요한 야코프의 성은 '브람스트 Brahmst'였다. 그러니까 브람스는 가계명이 '브람스트'인 가정에서 태어난 것이고, 따라서 브람스는 성장기에 주위 사람들이 자기 가족이 사는 집을 브람스트 가정으로 불렀던 것을 잘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왜 브람스가 되었을까? 그것은 브람스가 어릴 때 자꾸 Brahmst의 끝 철자 't'를 빼먹곤 했던 것과 관련있다. 브람스로서는 쓰기도 번거롭고, 끝의 두 자음 'st''에서 't'까지 발음하는 것이 잘 들리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아무튼 가계명 'Brahmst'를 불편하게 여겼던 브람스는 아버지에게 끝의 't'자를 빼 달라고 요청했고, 아버지는 장남의 설득에 넘어갔다.                                                                                                                                        열정적인 브람스 추종자였으며, 최초로 브람스에 대한 가장 중요한 전기를 썼던 막스 칼베크는 Brahmst', 'Braamst', 'Brahm', 'Bramst', 'Brambst' 같은 다양한 성씨들의 어원이 북독일 지역에 많이 분포해 있는 황금빛 금작화 덤불을 지칭하는 '브람 Bram'이란 말에서 파생한 것이라고 말해 주고 있다. 'Bram'이란 물론 일반화된 독일어가 아니라 북독일 특유의 방언인데, 그것은 흔히 라틴어로 'Planta genista'라고 쓰는 양골담초(금작화)를 뜻한다.  브람스라는 가계 이름은, 칼베크의 주장처럼, 북독일 황야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노란 야생화의 이미지를 그대로 갖고 있다. 즉, 북해 디트마르슈엔 지역, 모래투성이의 황무지를 뚫고 나와 황야를 노랗게 물들이는 들꽃, 그리고 그 들꽃이 지닌 강인한 생명력의 상징이 바로 '브람스'란 가계명의 이미지인 것이다.                                                                                                                                                      브람스의 고급한 정신성의 음악, 특히 고품격의 폴리포니 음악을 들을 때면, 우리는 그가 함부르크 빈민 구역 갱어피어텔의 초라한 구석방에서 태어났을 거라고 상상하기가 어렵다. 오히려 정보를 모르는 상태에서 그런 음악을 듣는다면, 그 음악의 작곡자가 무척이나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나 성장한 사람이 아닐까 하고 착각까지 할 것이다. 그토록 고결하고 아름다운 음악 세계가 척박한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의 정신에서 나왔을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람스'란 성씨에는 귀족의 고귀한 기품이나 고상한 취미를 연상시키는 어떠한 요소도 없다. 오히려 그 말은 북독일 황야의 야생화, 즉 '황야의 자식'이라는 거칠고 야성적인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을 뿐이다.

* 어린시절 -    어린 시절 브람스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의 머리카락은 흔히 '아마빛'으로 불리는, '모래 빛깔'과 유사한 연한 황갈색 금발이었다. 누가 봐도 꽃처럼 잘생긴 미소년의 얼굴이었다. 눈은 진지한 광채를 내는 푸른색이었으며, 섬세하고 창백해 보이는 얼굴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표정을 담고 있었다. 집에서는 예한 Jehann 혹은 하네스 Hannes란 애칭으로 불렀다. 브람스는 병약했던 누나 엘리제처럼 사춘기까지 신경성 두통을 앓곤 했지만, 그 외에 특별히 병을 앓거나 허약했던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는 건강한 편이었다.                                                                                                                              브람스는 내성적인 성격이었지만, 비교적 명랑하고 밝은 아이로 성장했다. 어린시절부터 그는 체구가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조그만 체구에서 가끔 당찬 모습을 연출하곤 했고, 또 조상 대대로 이어져 온 강한 생활력, 상인정신, 장인 기질 같은 것이 어린 시절 그에게도 엿보였다. 만년에 이르러 그는 어려웠던 젊은시절을 회고하면서 자신이 정말 "잘 견디고 열심히 살았다."고 당당하게 얘기했는데, 스스로에게 매우 비판적이었던 그가 자신의 과거를 그토록 긍정적으로 회고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브람스가 어린 시절 발을 들여놓은 음악공부는 강인한 정신 무장을 바탕으로 했다는 점에서 요즘 아이들이 음악 공부를 시작하는 상황과 비교된다. 그는 특별한 재능을 타고 났기 때문에 음악 공부가 어렵다거나 싫다고 느껴본 적은 없었지만 실로 음악이 좋아서 음악을 한다고  말할 수 있을만큼 여유를 가지고 정진할 수는 없었다. 어린 브람스에게 음악이란 우선 살아가기 위한 '생계 수단'이었으며, 날마다 열심히 해야하는 일이었고, 가족을 위해 당연히 수행해야 하는 일종의 의무 같은 것이었다. 그 의무가 때로는 너무 막중해서 문제였지만, 브람스는 어려서부터 그러한 의무를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오늘날 우리는 브람스의 음악이 대단히 학구적이고 정교하다고 평가하고, 그 점을 그의 음악의 중요한 장점으로 보는데, 그렇게 정교하고 튼실한 음악은 저절로 나온 것이 아니다. 그 정도의 음악이 탄생하기까지 브람스가 쏟은 열정과 노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의 학습은 소정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는 이른바 '장인'근성을 바탕으로 이뤄졌다. 그러한 근성은 주로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 첫 스승  -    1840년 일곱살 난 아들을 데리고 만난 사람이 함부르크의 피아노 선생 오토 코셀이었다. 코셀은 당시 27살이었다. 당시 코셀에게서 브람스가 받은 피아노 교육은 주로 체르니, 클레멘티, 크라머, 그리고 후멜등의 작품을 공부하는 것으로 이뤄졌다.  나날이 놀라운 속도로 발전해 가는 브람스는 그의 아버지처럼 배우고자 하는 의욕이 대단했다. 그러던 어느 날, 브람스는 선생에게 작곡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그때 브람스는 겨우 아홉살이었는데, 사실상 그때부터 브람스는 몰래 자신의 작품을 쓰고 있었다.  

* 위대한 스승 마르크센  -    브람스의 음악교육에서 코셀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스승이었지만, 브람스의 스승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사람은 마르크센이다. 마르크센이 브람스를 제자로 받아들인 것은 1843년, 브람스가 열 살 때 였다. 브람스의 가정형편을 잘 아는 마르크센은 그에게 어떤 보수도 요구하지 않았다. 브람스는 이듬해 요한 프리드리히 호프만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초등학교는 마르크센 선생의 레슨을 받는 1847년까지 다녔다. 아무튼 마르크센과의 공부는 그 전부터 시작되었으니 약 7년간 피아노를 배운 셈이다. 피아노 공부를 마치고 나서 그 이듬해까지 브람스는 마르크센선생과 작곡과 이론 공부를 더 했다. 브람스는 마르크센 선생으로부터 자신의 재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고도의 피아노 기술을 배웠다. 무엇보다도 마르크센 선생은 음악을 보는 관점이나 가치관에서 브람스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그로부터 배운 가치관은 브람스가 앞으로 어떤 음악가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이정표가 되어 주었다. 마르크센은 브람스에게 바흐 음악의 위대함을 깨닫게 해 주었고, 독일의 옛 거장들과 초기 음악의 튼실한 형식을 세밀하게 익히게 해 주었다. 나이는 어렸지만 마르크센 선생의 가르침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브람스는 결국 이 시기의 배움 덕분에 평생에 걸쳐 옛 음악을 소중히 다루고, 바흐, 모짜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등 위대한 작곡가들의 작품을 보석처럼 여기며 살게 되었다.                      브람스는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였지만, 기본적으로 대단히 감성적이고 로맨틱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브람스는 옛 형식이나 법칙을 무시하고 과도한 감정주의로 빠지는 후기 낭만주의를 경계했다. 평생에 걸쳐 그는 자신의 음악이 세기말적인, 급격한 감정주의로 흐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경주했다. 

* 브람스의 가난  -    브람스에게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어두운 면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가난이었다. 가난은 그의 성격과 행동양식, 그리고 건강에 지속적으로 악영향을 주었다. 그는 부모의 경제적 도움을 거의 받지 못했다. 도움은 커녕 자신이 가족을 벌어 먹여야 했다. 브람스는 선생과 공부하고 있는 중에도 열 두 살 무렵부터 쥐꼬리만한 보수를 받고 피아노 레슨을 시작했다. 열 세 살이 된 1846년부터 브람스는 스승의 지도를 받으면서 틈틈이 교회에 나가 오르간을 연주하고, 함부르크 극장에 나가 가수의 노래에 맞춰 반주를 하거나 인형극을 반주하는 일을 해야 했다. 또 창작에도 열의를 보여 춤곡이나 환상곡등을 작곡해서 몇 차례 작은 콘서트도 개최했다. 즉, 낮동안의 브람스는 소년 음악가로서 여전히 열심히 자신의 앞날을 개척해 나가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밤이 되면 그 소년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가 있어야 할 곳은 어린아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함부르크 부둣가의 술집이나 무도장이었다. 

* 19세기 중반유럽의 상황  -    브람스가 경력을 시작하던 19세기 중반 유럽은 정치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매우 혼란스러웠다. 전염병의 창궐, 파국에 이른 작황, 빈곤, 기근, 그리고 실업과 상업활동의 급격한 감소 등 이미 1835년 무렵부터 시작된 여러 문제들이 10여년이 지나 다시 크게 불거진 상황이었다. 유럽 각국은 각기 독특한 정치적, 사회적 배경에서 불만이 폭발하는데 , 불만을 터뜨린 혁명의 주도세력은 대부분 프랑스 대혁명의 이념에 고무된 자유주의 신지식인들이었다.                이런 사회 분위기를 틈타, 1848년 헝가리에서도 합스부르크 왕조에 대한 반란혁명이 일어났고, 이때 수 많은 헝가리인들이 함부르크로 피난하기 시작했다. 물론 함부르크가 최종 목적지는 아니었다. 피난민 대부분은 미국으로 건너가기 위해  당시 최대 항구도시였던 함부르크로 몰려든 것이다.

* 레메니와의 만남 -    1850년 8월 14일 브람스는 헝가리 망명 음악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에두아르트 레메니를 만나게 된다. 유대계 헝가리인이던 레메니는 빼어난 바이올린 솜씨를 자랑했다. 브람스보다 다섯 살 위인 그는 브람스를 만날 당시에 이미 음악계에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1850년 여름에 함부르크에서 열일곱 살의 브람스를 만나게 된 레메니는 브람스의 피아노 연주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렸고, 그와 2중주 파트너로 함께 활동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다. 브람스와 레메니의 본격적인 연주여행은 1853년 봄, 정확히는 4월 19일에 시작되었다. 

* 요아힘과의 만남  -   레메니와 브람스는 연주 여행중에 하노버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을 만나게 된다. 요아힘은 당시 하노버 궁정 오케스트라의 악장으로 있으면서 여러 음악 행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요아힘은 레메니처럼 헝가리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레메니와는 빈에서 동문 수학한 사이였다.  당시 요아힘의 나이는 브람스보다 두 살 많은 스물 두 살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이미 10대 중반에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서뿐만이 아니라 지휘자, 작곡자로서도 인정 받고 있었다. 세 사람이 만났을 때, 요아힘은 처음부터 친구인 레메니가 아니라 레메니가 데려 온 브람스에게 끌렸고, 그에게 계속 관심을 보였다. 요아힘은 브람스가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났고, 음악적 이상도 자신과 비슷하다는 점을 즉각적으로 눈치챘다. 그런데다 말이 없고, 진지하고 고결한 성품까지 갖추고 있어서 믿음직한 마음까지 생겼다. 요아힘은 브람스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상의하고, 여름에 괴팅겐에 와서 자기를 찾으라고 말했다. 그 후 레메니와 브람스는 6월 4일에 괴팅겐에 갔고, 거기서 요아힘을 한 번 더 만났다.

* 슈만과의 만남  -    1853년 9월 30일 한낮이었다. 뒤셀도르프에 도착한 브람스는 곧장 슈만의 집으로 달려갔다. 외출한 슈만부부를 만나지 못한 브람스는 다음날 아침 다시 슈만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 로베르트 슈만이 직접 문을 열었다. 가운을 걸치고 슬리퍼를 신은 슈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가워하며 브람스를 훑어보았다. 브람스는 다소 수줍은 표정으로 인사를 하고 자신을 소개했다. 요아힘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기 때문에 슈만도 사실 그를 무척 만나 보고 싶어했다. 당시 슈만의 나이는 마흔셋, 브람스가 비록 한참 아래였지만 브람스를 대하는 슈만은 약간 떨고 있었다. 여전히 미소년의 섬세한 용모를 지닌 그의 얼굴에 묘한 수줍음이 교차했지만, 젊은 청년의 눈에는 어떤 불타오르는 정열 같은 것도 보였다.               그렇게 어색한 첫 만남의 순간이 지나간 뒤, 슈만은 그라프 피아노(그랜드 피아노)가 있는 좁은 거실로 브람스를 안내했다. 슈만은 브람스에게 피아노를 한번 연주해 보겠느냐고 했다. 브람스는 피아노 의자에 앉자 마자 갑자기 매우 인상적인 음악을 펼쳐 보이기 시작했다. <피아노 소나타 C장조>였다. 그것은 확실히 베토벤을 연상시키는 작품이었다. 슈만은 이 청년의 작품이 베토벤의 어떤 중요한 정신적 모습과 매우 닮았음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렸다. 슈만은 점점 흥분했다. 양미간을 찌푸리며 환한 얼굴로 신나게 건반을 두드리던 브람스는 연주를 갑자기 중단해야 했다. 슈만이 연주를 막았기 때문이다.

   "아, 잠깐만 아내를 불러야겠어." 이 경이로운 순간을 혼자 목격하고 있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슈만은 클라라를 찾아 데려 오기 위해 급히 거실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슈만은 클라라를 데리고 거실로 들어왔다. "여기오, 클라라. 당신 이런 음악은 전에 못 들어봤을거요. 자, 젊은이. 자네 소나타 다시 시작해 보게." 가정주부였지만 여전히 청순하고 차분한 이미지에 지적인 눈망울을 지닌 클라라, 아니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까지 옆에서 브람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남편의 손에 이끌려 온 클라라의 눈은 점차 묘한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클라라의 표정에는 젊은 브람스의 음악과 연주에 매료되어 가는 모습이 역력했다.  피아니스트의 시각에서 클라라는 청년이 앞으로 '크게 성장 할 나무'임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렸다. 작곡가 입장에서 슈만은 브람스가 자유로운 즉흥성과 가장 엄격한 논리를 겸비한 대곡 작곡가의 틀을 지니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슈만은 그날 일기에 "브람스, 천재가 방문했다."고 썼다. 클라라도 그날 브람스에 관한 인상을 일기에 남겼다.                      "이곳에 다시 신이 내려보낸 것 같은 사람이 와 있다! 그는 우리 앞에서 자작곡 소나타와 스케르초를 연주했다. 모두 풍부한 환상, 깊은 정서, 그리고 거장풍의 형식을 갖춘 작품이었다. 로베르트는 그의 작품에는 고칠 부분이 전혀 없다고 말한다.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그를 봐도, 연주할 때 흥미롭게 변하는 그 젊은이의 얼굴을 봐도, 아무리 어려운 부분이라도(브람스의 작품은 실제로 대단히 어려웠다.) 쉽게 극복해 나가는 멋진 손가락을 봐도, 무엇보다도 그렇게 놀라운 그의 작품을 대하고 있자니 정말 감동적이었다"

* 클라라 슈만  Clara Schumann 1819 - 1896  -    독일의 탁월한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로 당시에는 매우 드문 '여성 작곡가'였다. 클라라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비크는 저명한 피아노선생이었고, 어머니 마리아네 트롬리츠 역시 피아니스트였다. 클라라는 아주 어릴 때부터 라이프찌히 음악계의 엘리트 서클에 참여하면서 천재 음악가로 각광받았다. 그녀의 아버지 비크는 당시 보잘 것 없는 음악도였던 슈만과 딸이 결혼하는 것을 극구 반대했는데, 클라라는 아버지의 격노를 용감하게 극복하고 법정투쟁까지 거쳐 1840년 슈만과 결혼했다.  슈만의 아내로 혹은 위대한 피아니스트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녀는 많은 피아노 작품과 함께 성악곡, 실내악곡을 쓴 뛰어난 작곡가이기도 하다. 클라라의 직업적, 사회적 연줄은 브람스의 경력 초기에 그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클라라는 음악과 관련해서는 물론이고, 인생 문제에서도 브람스에게는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친 평생의 동료였다. 

* 로베르트 슈만 Rebert Schumann 1810 - 1856  -    독일의 작곡가로 낭만주의 시대 가장 중요한 기수 중의 한 사람이었다. 현재까지도 발행되는 독일의 음악 저널 <신음악지>를 창간하여 음악비평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 클라라의 집에 기거하면서 그녀의 아버지 비크 교수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브람스의 천재성을 즉각 알아보고 젊은 작곡가의 길을 터 준 슈만은 브람스에게 평생 잊지 못할 은인이었다. 브람스는 따뜻한 마음씨를 지닌 그를 깊이 존경했다. 그런 그가 정신 질환을 앓아 불행한 최후를 맞은 일은 브람스와 클라라에게 멍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는 라인강에 투신, 가까스로 구조되었지만 본의 엔데니히 정신병원에 수용되었고,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브람스는 슈만과의 인연을 겨우 3년간 이어갔을 뿐이지만 따스한 마음씨를 지닌 슈만을 평생 기억했고, 그의 음악을 매우 좋아했다.

** < 브람스의 음악 > **

    브람스가 낭만주의 시대의 작곡가이고 본질적으로 낭만주의 작곡가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는 당시 인기를 끌고 있던 낭만주의보다는 그 이전의 위대한 대가들을 숭배하는 전통주의자였다. 브람스에게 전통주의란 무작정 옛 전통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이 아니라 옛 전통 위에서 자신의 독창적인 세게를 전개하고 구현해 나가는 것이었다. 그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여 최고 수준의 음악을 만드는 것을 중요한 창작 태도로 삼았다. 장인 정신을 신봉했던 그는 평범한 작품을 만드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음악은 단순히 기분을 좋게 하거나 육체에 쾌감을 주는 자극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 안에서 끊임없이 추구하고 성취되는 영적이고 지적인 탐구과정일 때 가치를 갖는 것이다.                                                                  브람스에게 음악 창작이란 개인이 지닌 중요한 정신의 근원을 파헤치는 탐구 행위였다. 브람스는 그 작업을 아주 신중하게 진행했지만, 그렇다고해서 그 숭고한 이념을 외적인 수단으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정신적인 작업을 절대로 음악이 연주되는 곳 이상으로, 자신이 끊임없이 탐구하는 영역 밖으로까지 확대해서 해석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그 숭고한 정신을 독일이라는 하나의 세계만을 위해 사용했던 바그너의 편집광적인 모습을 그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음악이 정치적, 사회적 이념을 위한 수단으로 쓰이는 것을 그는 용납하지 않았다. 그에게 음악 창작이란 인간의 정신, 마음, 영혼의 비밀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것을 향유하는 공동체 안에서의 작업이었다.                                                                    브람스는 작곡가, 연주가, 청중이 조화를 이루는 공동체에서 자신의 음악이 제대로 통용되고 있을 때 마음이 편안했다. 공동체의 분위기를 원만하게 끌고 가기 위해 브람스는 자신의 음악을 공동체의 수준에 맞춰야 했다. 그래서 그는 기본적으로 자신만이 이해하는 음악을 쓰려고 하지 않았다. 적어도 브람스는 그렇게 했다고 여겼지만, 당시 청중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이해력이 한참 못 미쳤다.  생전에 슈만은 훌륭한 작품을 알아 볼 수 있는 뛰어난 감성과 지성을 갖춘 사람들을 좋아했고, 얄팍한 기교나 숭배하고 모험심도 없는, 그래서 결국은 정말 훌륭한 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청중을 경멸했다. 그는 그런 답답한 청중을 '속물'이란 뜻의 '필리스테리움 Philisterium'이라고 불렀다. 

* 문자 이니셜로 음악 만들기  -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Frei Aber Einsam)  --    슈만은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요아힘을 무척 아꼈는데, 마음이 따뜻한 낭만주의자였던 슈만은 마침 요아힘을 위로해 줄 만한 재미있는 묘안을 떠올렸다. 그것은 요아힘 주위의 가까운 사람들이 힘을 모아 그에게 음악 선물을 해 주자는 것이었다. 선물은 곧 슈만과 브람스, 디트리히가 공동 작곡한 소나타를 뜻했다. 슈만은 요아힘의 모토였던 '자유롭지만 고독하다 Frei Aber Einsam'에서 각 단어의 앞머리를 딴 <F-A-E 소나타>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브람스와 디트리히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동의했고, 슈만이 1악장, 디트리히가 2악장, 그리고 브람스가 3악장 스케르초를 썼다.                                                                                                                      이름이나 어구의 첫 글자를 따서 음악을 만드는 일은 낭만주의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이미 바로크 시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도 <푸가의 예술>에서 본인의 이름 이니셜, 즉 'B-A-C-H(B)'를 틀로 사용해 작품을 썼다. 신비로운 상징체계를 좋아했던 낭만주의 음악가 슈만은 이름자를 가지고 작품을 쓰는 것을 대단히 좋아했다. 서양 음악 사상 그런 창작법을 그만큼 즐겼던 음악가도 없을 것이다. 잘 알려진대로 슈만의 작품번호 1번인, <아베크 변주곡>은 하이델베르크에서 알게 된 소녀 '메타 아베크(Meta Abegg)'의 'ABEGG'를 기초로 해서 쓴 것이다. 브람스는 요아힘의 모토 '자유롭지만 고독하다'의 이니셜 F-A-E를 가지고 <현악 4중주 2번> (op.51)의 첫 악장을 쓰기도 했다.

* 클라라의 죽음  -    1896년 5월  클라라는 세상을 떠난다. "나는 오늘 내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오직 한 사람, 그 사람을 묻은 거라네"라고 브람스는 친구들에게 말했다.  "이렇게 고독한데도 살아갈 가치가 있는가?" 브람스의 애처로운 말을 들은 주위 사람들은 모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 브람스의 죽음  -    1896년 여름이 되면서 브람스의 몸에 병세가 확연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브람스는 평생동안 아주 건강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브람스는 심각한 병에 걸려 병원에 간 적은 한 번도 없었고, 평생 건강한 몸을 유지했다. 가을이 되어 병이 깊어졌다. 브람스는 오래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처럼 간질환을 앓고 있었다. 병명은 간암이었다. 11월이 되자 브람스는 하루가 다르게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지고 있었다. 1897년 4월 3일. "브람스의 갈증을 채워주기 위해 건넨 라인포도주를 천천히 마신 후 "아, 참 맛있네." 그리고 "자네는 좋은 사람이야"라는 말도 힘겹게 이어 붙였다. 위대한 독일의 음악가 요하네스 브람스가 세상을 떠나며 남긴 마지막 말은 이 정도였다. 아침 9시경 슬픈 얼굴로 임종을 지켜 보고 있던 친구들 앞에서 브람스는 마지막 눈물을 떨어뜨렸다.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어느새 베개를 적셨다. 그리고 눈물이 스며들듯 스르르 영면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브람스의 시신은 빈의 중앙묘지에 안치되었다. 생전에 브람스는 자신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베토벤과 슈베르트 곁에 누우면 아주 기쁠 것이라고 말했는데, 소원대로 그들과 함께 있게 되었다. 

***<인간 브람스>***

* 외모 -   브람스는 키가 무척 작았다. 성인이었을 때 키가 5피트도 되지 않았다. 기껏해야 153센티미터 정도였다. 20살인 1853년 디트리히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받은 인상은 "어려 보여 소년같은 외모에 긴 머리가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40대가 되면서 브람스는 뚱뚱한 체형으로 바뀌었다. 45살이 되면서는 브람스의 외모에 아주 현저한 변화가 생겼다. 수염을 기르기 시작한 것이다. 브람스는 친구 비트만에게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 "수염을 깎고 있으면 내가 배우나 성직자처럼 보인다네." 브람스의 수염은 30대까지 그리고 40대에 들어서까지도 희미하게 남아있던 젊은 시절의 인상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즉 젊은 시절의 섬세한 미소년의 특징들은 수염 때문에 거의 가려졌다. 하지만 친절해 보이면서도 이글거리는 눈빛은 더욱 강렬하게 빛났고, 얼굴의 전체 이미지도 더 엄격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 옷차림 -   브람스는 옷을 간소하게 입었고, 여기저기 기운 자국이 있는 낡은 옷도 편하다는 이유로 계속 입고 다녔다. 그러나 비록 낡은 옷을 입고 다니고 패션에 둔감했어도 추레한 편은 아니었고, 항상 깨끗이 세탁해서 입고 다녔다.  중년 이후 브람스는 아주 특징적인 보행을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뒷짐을 지고 걷는 버릇이었다. 빈둥거리는 소설가처럼 어슬렁거리며 걷는 브람스의 모습이 앞에서 봐도 뒤에서 봐도 사자처럼 보였고, 검은 옷을 즐겨 입었는데, 그마저도 줄어들어 작은 것처럼 보였고, 중산모자에 코안경 등, 빈의 거리에서 마주치는 그는 과거에서 온 인물처럼 보였다. 

* 목소리 -    목소리는 하이톤이었다. 브람스는 젊을 때부터 지나치게 높은 자신의 목소리에 불만이 많았다. 게다가 20대 중반 데트몰트 궁의 합창단 징페어라인을 맡아 지휘하면서 소리지르는 지휘법이 목 상태를 악화시켜, 높은 음성에 허스키한 탁성까지 갖게 했다. 

* 검약한 생활 -    중요한 작품들의 탄생과 여러가지 음악적 행보로 유명해진 브람스는 40대 중후반쯤 되면 상당한 재산을 모으게 된다. 물론 수입의 대부분은 음악 작품의 판권으로 얻은 것이었다. 브람스는 독주곡은 물론이고 2중주용 피아노곡들이 교양 있는 일반 가정에서 높은 인기를 끌었기 때문에 그가 판권료로 챙긴 돈은 엄청났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검소하게 생활했다.  돈이 없을 때나 있을 때나 그의 씀씀이는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책이나 음악 작품을 구입하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았지만, 그 외에 자기 자신을 위해 많은 돈을 쓰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대신 그는 곤경에 빠진 친구 혹은 낯선 사람일지라도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들을 돕는 데는 많은 돈을 썼다. 

* 습관 -    빈에서든 어디서든 브람스는 아침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있었다. 대개 그의 기상 시간은 오전 5시경이었다. 아침에 아주 진하고 독한 블랙 커피를 마시는 습관이 있었던 그는 커피 한 잔으로 눈 주위에서 머뭇거리는 잠을 쫓아버리고 이른 아침부터 산책을 하러 나갔다. 산책을 한 후에는 집에 들어와 오전 시간 내내 작품을 썼다. 작품 창작의 욕구가 강할 때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정오까지 열심히 작품을 써 내려가기도 했다. 오후에는 대개 외출을 했다. 그리고 저녁에는 친구들과 만나 담소를 즐겼다.                                                                                                                                                         돈이 많아도 그가 식사하는 곳은 대개 평범한 카페나 식당이었다. 빈에서 그가 즐겨 찾던 식당은 '붉은 고슴도치'라는 레스토랑이었다. 이곳은 오래전부터 유명 인사들이 많이 찾아와 식사를 하곤 했는데, 특히 그가 존경하던 베토벤이 식사하던 식당이 바로 '붉은 고슴도치'였다. 브람스는 남들의 시선을 끌지 않는 작고 허름한 구석 테이블에 앉아 친구들과 오랫동안 얘기를 나누며 식사를 즐겼다.                                                                                                                                                     식사 후에 이 생각 저 생각 하면서 유유히 산책하는 동안을 브람스는 가장 편안하고 여유로운 시간으로 여겼고, 하루 일과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했다. 외출했다가 아파트에 돌아오는 시간은 6시쯤이었다. 그 이후의 시간에는 조용히 앉아 편지를 쓰거나 다른 작업을 하곤 했다. 

* 성격 -    브람스는 몹시 무뚝뚝했다. 마음은 그렇지 않았지만, 말을 부드럽게 하지 못하고 사람들을 친절하게 혹은 살갑게 대하는 것도 잘 못했다. 브람스는 평소 여러 사람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주기도 했는데, 그것은 그가 말하는 데 매우 서툴기 때문인 경우가 많았다. 무뚝뚝함은 어릴 때부터 수줍음을 많이 타고 말주변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성장한 브람스가 자신의 그런 모습을 감추기 위해 앞세운 방패막이였다.

* 음악에 대한 열정 -    브람스는 척박하고 열악한 학문적 환경에서 초기 음악을 열심히 연구했던 사람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지루하고 고루한 음악이라며 외면하던 초기 음악에 브람스는 왜 그토록 남다른 열정을 보였을까? 브람스는 어떤 일이든 목표를 높게 설정해 놓고 그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음악공부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을 것이다. 

* 음악자료 수집광 -    브람스는 10대 초반부터 탐욕스러울 정도로 책을 모았다. 브람스가 언젠가 "나는 책을 사는데 돈을 다 써 버린다."고 고백했던 것처럼, 브람스는 돈이 생기면 고서점에 들러 책을 뒤적이는 것이 습관이었는데, 서점에 장시간 머무르며 음악 관련 서적 혹은 출판되지 않은 채 서점 구석에 방치되어 있는 중요한 작품들을 찾아내어 자기 것으로 삼는 일을 아주 좋아했다. 그런 그의 취미를 잘 알고 있던 요아힘이나 클라라는 브람스에게 선물 할 일이 생기면 음악 작품이나 책을 사 주곤 했다. 그가 평생에 걸쳐 모은 음악 관련 서적과 자료는 거의 개인 도서관을 차려도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분량이었는데, 그 중 2,000여 건의 귀중한 자료는 현재 빈의 음악 동호인 협회에 잘 보관되어 있다. 

* 음악의 색감 -    브람스 음악의 색감은 무엇일까? 브람스의 음악은 앙상한 나뭇가지, 낙엽, 우수, 고독 등 가을의 이미지와 잘 부합하는데, 대체로 그의 음악은 갈색이나 짙은 고동색 혹은 진노란색을 떠올리게 한다.  북독일 평야에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진노란색 들꽃 '브람 Bram'은 브람스 가계명의 뿌리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브람스 음악의 색깔을 참으로 적절히 그려놓았다고 생각한다. "노란색 야생화로 만발한 북독일 황야" 브람스 음악의 색감을 말해 주는 가장 멋진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 종교관 -   브람스의 종교관은 교회에 다니지 않으면서 성서의 내용을 거부하지 않는 '반(半) 크리스천'에게서 보이는 순수한 인간적 성찰의 반영인 것이다. 물론 기독교 교의로는 있을 수 없는 신앙인의 태도지만, 이런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와 천국의 세계도 인정하지만, 형벌(지옥)의 세계는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것은 정신주의에 몰입한 사람이 신앙심을 버리지 않은 상태에서 내세를 이해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런 생각들을 종합해 보면, 브람스의 종교는 바로 '휴머니즘에 입각한 기독교'였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이 없이는, 인간을 초월해서는 어떤 새로운 단계도 있을 수 없다."         

  브람스의  레퀴엠에 심판의 날이 없다는 것은 브람스가 죽은 자보다는 남겨진 사람들,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데 역점을 두었음을 뜻한다. 이미 죽은 사람이 겪어야 할 '알 수 없는 곤경'을 표현하기 보다는 남겨진 사람들, 그리고 계속 살아가야 할 사람들의 고통과 어려움을 동정하는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는 분명 인간에 대한 연민이다. '심판의 날'이 없음은 인간이 죽은 후에 당할 고통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브람스가 인간에 대한 연민을 얼마나 중시하며 레퀴엠을 쓰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 말해 준다.

    브람스는 신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명철한 이성과 민감한 감성과 신중한 예지력으로 신을 느꼈다.  브람스가 이해하는 하느님, 즉 신(God)은 어떤 존재인가? 아벨과의 대화에서 브람스는 또 이렇게 말한다. "신은 성령이네. 성령은 우주이고 말일세." 그가 주님(Herr)'이라고 할 때 그는 그 단어를 자신의 토양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신을 가르키는 것이면서 동시에 기독교의 어떤 도그마에도 얽매이지 않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즉, 그가 '주님'이라고 할 때 그는 기독교의 하느님을 지칭하기도 했지만, 엄격한 기독교에 갇힌 하느님이 아니라 창조주 혹은 포괄적인 의미의 세계의 운영자를 지칭하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 소유하지 않는 사랑 -    소유하지 않는 사랑! 그것은 결혼을 하지 않아야 사랑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며, 독신주의를 강조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결혼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상대방을 완전히 소유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며, 결혼을 하지 않아도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방점을 찍는다. 즉 사랑에서 관건은 모든 경우에 육체를 누가 소유했느냐가 아니라 정신적 교감이 어느 정도 깊이로 이뤄졌는가에 달려 있다고 말하고 싶다.                                                    사랑이란 물질의 세계에서 태어나 진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계속 발전하는 것이라면 옛날 사랑보다, 지금 사랑이 훨씬 더 아름답고 고급스러워야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사랑은 진화나 발전의 속성을 가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눈으로 볼 수 없는 어떤 정신세계에서 온 것이며, 사랑의 발전이란 계속 복잡하게 변화하는 물질의 진화 과정과는 다른 논리를 가진다. 그것은 끊임없이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순화를 통해 더 맑아지는 어떤 것이다.  요컨대 브람스와 클라라는 결혼해서 함께 살지 않았어도 서로 서로 완전히 소유했다고 믿는다. 역설적이지만 그들은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완전히 소유했다. 그 완전한 소유는 육체적 소유가 아니고 무쇠보다도 강한 정신적 소유였기에 가능했다.  브람스와 클라라는 승화된 정신적 사랑을 통해 슈만에게도, 그리고 영원한 사랑에도 전혀 부끄럽지 않을 수 있었다. "내가 평생 사랑했던 유일한 사람." 클라라가 세상을 떠났을 때, 브람스가 했던 이 말은 그들이 꿈 꾼 '영원한 정신적 사랑'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 슈만 서클 -    슈만 서클은 슈만부부를 중심으로 요아힘, 율리우스 오토 그림, 알베르트 디트리히 등 음악인과 베티나 폰 아르님 등 당대 최고의 문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모두 높은 이상주의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유토피아에 머물면서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다른 격조 높은 정신주의를 꿈꿨다. '순수주의', '고결한 영혼주의', 그리고 거룩하고 숭고한 '관념론적 사고'를 숭배했다. 푸르트 뱅글러가 "독일 낭만주의자 가운데 가장 고결한 인물"이라고 찬사를 보냈던 인물이 슈만이었다. 슈만과 슈만 서클의 사람들이 고귀한 '정신주의'를 신봉했다는 사실에서 그들이 어떤 문제든 가볍게 처리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브람스와 클라라가 그렇게 쉽게 결합할 수 없었던 중요한 단서를 하나 얻게 된다. 그들의 열정은 식었다기보다는 정제되고 순화되고 승화된 것이었고, 그것은 상대방에 대한 깊은 이해심으로 거듭났다. 브람스는 자신의 아름다운 영혼으로 슈만과 클라라의 부부애를 진심으로 존중해 주었다. 브람스는 언제든 슈만 부부의 관계에 대해 얘기할 때면 항상 최상으로 존경하는 용어를 사용했다. 먼 훗날 일흔이 넘은 클라라에게 브람스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당신과 당신의 남편은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험을, 그리고 가장 값진 보물과 가장 고귀한 순간을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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