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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맹 롤랑, 베토벤의 생애

* 로맹 롤랑 -    프랑스의 소설가, 극작가, 평론가로서 20세기 프랑스 문학의 가장 위대한 신비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고등사범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했고 셰익스피어, 베토벤, 스피노자, 톨스토이에 심취하였고, 음악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  1903년 '베토벤의 생애'를 썼다.

* 머리말 - "옳게 또 떳떳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 오직 그러한 사실만으로써 능히 불행을 / 견디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입증하고 싶다." --베토벤 (1819년 2월 1일, 빈 시청에 보낸 편지에서)

*   "할 수 있는 모든 선을 행하고 / 자유를 무엇보다도 사랑하고 / 비록 왕좌의 편을 들어서라도 / 절대로 진리를 배반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 베토벤 1792년, 기념첩-

<베토벤의 외모>      

  그는 키가 작고 뚱뚱하며 뒷덜미가 굵은, 역사(力士)같은 골격을 가졌다. 얼굴은 커다랗고 붉그데데하였다. 다만 만년에 이르러서는 얼굴빛이 병자처럼 누렇게 되었다. 특히 겨울에 전원을 거니는 일이 별로 없이 집안에만 들어 앉아 있던 때에는 더욱이 그러했다. 이마는 단단하고 두드러졌다. 몹시 검고 텁수룩한 머리털 - 빗질이라고는 한 번도 한 일이 없는 듯한 머리털은 제멋대로 사방으로 솟구쳐 '메두사 머리의 뱀들' 같았다.       

   그의 눈은 열정으로 불타고 있어, 그를 만나 본 사람은 누구나 그 정기에 감명을 받았다. 그러나 그 눈빛에 관하여서는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었다. 검붉고 비장한 얼굴 가운데서 침침한 빛으로 번득이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대개는 검게 보았지만, 사실인즉 그의 눈은 푸르스름한 회색이었다. 그 눈은 조그맣고 깊숙이 감겨 있는 듯 보였으나, 열정이나 분노가 끓어오를 때에는 갑자기 커다랗게 열리고, 그럴때는 눈동자가 빠르게 구르면서 모든 생각을 놀라우리만큼 진실되게 비쳐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가끔 하늘을 향하여 우울한 시선을 돌리기도 했다. 코는 짧고 네모져서 너부죽한 것이 흡사 사자의 콧마루 같았다. 입술은 얄팍했고, 아랫 입술이 윗입술보다 약간 앞으로 나온 편이었다. 턱은 억세어서 호두라도 깨물어 부스러뜨릴 만하였다. 아래턱의 오른편으로 약간 치우쳐 깊숙이 우물진 보조개는 얼굴 전체의 균형을 야릇하게 깨뜨리고 있었다.                         

  모세레스가 말한 바에 의하면 - "그의 웃는 얼굴은 인자하였다. 사람들과 이야기 할 때는 흔히 친절하고 부추기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반면에 소리를 내어 웃는 웃음은 듣기 싫고 괄괄하고 얼굴까지 찡그리는 웃음이었으며, 더구나 늘 짧게 끊어져 버리는 웃음이었다." - 그것은 기쁨을 자주 가져보지 못한 사람의 웃음이었다. 그가 습관적으로 띠던 표정은 멜랑콜리였다. "사라질 수 없는 슬픔"이었다. 렐슈타프는 1825년에 말하기를 "베토벤의 부드러운 눈과 그 눈이 지닌 깊은 슬픔"을 보고 울고 싶어지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고 한다. 

<베토벤의 출생>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1770년 12월 16일 퀼른 근방, 본 시의 어느 가난한 집의 보잘 것 없는 다락방에서 태어났다. 선조는 플랑드르 혈통(그의 할아버지 루드비히는 그의 집안에서 가장 유능한 인물로 베토벤이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인데, 그는 앙투와프 태생이었고, 스무살 쯤 되어 비로소 본 시에 정주하여 선거공 댁의 악장이 되었다. 이것은 베토벤 성격의 그 극성스러운 자주성이라든가, 그 밖에도 반드시 독일적이 아닌 여러가지 그의 성질을 이해하기 위해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이다. 그의 아버지는 본디 총명하지 못한데다 술주정뱅이 테너 가수였다. 어머니는 요리사의 딸로서 어떤 남자 종과 결혼했다가, 과부의 몸이 되어 재가했다. 

<애처로운 유년시절>    

  유년시절을 행복하게 보냈던 모짜르트와 같은 애정이 넘치는 가족적 분위기는 없었다. 애초부터 그에게는 인생이 슬프고 가혹한 싸움이었다. 아버지는 베토벤의 음악적 자질을 이용하여 신동이란 간판을 붙여 그를 구경거리로 만들려고 했다. 네 살이 되자 아버지는 그로 하여금 여러시간 동안 클라브 생(피아노 전신) 앞을 떠나지 못하게 하거나, 또는 바이올린을 주고 그를 방 안에 가두어 두기가 일쑤였고 강제로 공부를 강요했다.  

<소년시절>     

  베토벤의 소년시절은 물질적 근심, 빵을 벌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걱정 등, 어린 몸으로 너무나 일찍부터 걸머진 책임으로 인해 슬프기만 했다. 열한 살에 극장 오케스트라의 일원이 되었고, 열세 살에는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1787년 17살 때에는 극진히 사랑하던 어머니를 여의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참으로 좋은 어머니, 사랑스런 어머니, 나의 가장 귀한 친구였다! 어머니라는 정다운 이름을 불러 볼 수가 있었으며, 그것을 어머니가 들어 주시던 그때의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없었으리라." 어머니는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열일곱 살 때에는 일가의 가장이 되어 두 어린 동생의 교육까지 떠맡았다. 집안을 다스려 나갈 능력이 없는 술주정뱅이 아버지를 은퇴시켜 줄 것이 자기 스스로 청원해야만 한다는 것이 그에게는 부끄러운 일이었다. 아버지가 낭비해 버리지 않게끔 아버지의 연금은 아들의 손에 지불되었다. 이러한 여러가지 슬픔은 베토벤의 가슴속에 깊이 깊이 새겨졌다.             1796년 그는 수첩에 이렇게 적었다. "육신은 아무리 잔약할 지라도 나의 정신은 꼭 이기고야 말리라!.... 스물 다섯 살! 나도 이제 스물 다섯 살이다… 인간으로서의 전 역량을 드러내야 할 나이가 된 것이다."

<청각장애>      

  1802년의 "유서"에 베토벤은 1796년에 귓병이 났다고 쓰고 있다. 베토벤의 작품 일람표를 보면 1796년 이전의 작품으로는 작품 제1번의 삼중주곡 셋 밖에 없다. 작품 제2번, 즉 피아노를 위한 최초의 세 소나타는 1796년에 발표되었다. 그러므로 베토벤의 전 작품은 베토벤이 귀가 어두워진 뒤에 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베토벤의 귓병에 관해서는 1905년 5월 15일의 의학시보에 게재된 클로츠 포레스트 박사의 논문 참조. 이 논문의 필자는 베토벤의 병의 근원이 '유약성 허약 체질'(아마도 어머니의 폐결핵)이 있었으리라고 보고 있다.  1796년에 귀의 나팔관 카타르를 진찰했는데, 이것이 1799년경에 급성 중이염으로 악화되었다는 것이다. 치료가 제대로 되지 못하여 중이염은 만성이 되고 이에 따르는 모든 결과가 일어났다. 완전히 청각장애자가 되지는 않았으나 귀는 더욱 더 어두워갔다. 베토벤은 높은 소리보다도 낮은 소리를 비교적 잘 들을 수 있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만년에 그는 나무토막을 사용하였는데, 그 한 끝을 피아노 속에 넣고 또 다른 한끝은 이빨로 물고 있었다고 한다.  작곡을 할 때는 이런 방법을 써서 소리를 듣곤 했다. 

    여러해 동안 그는 아무에게도, 가장 절친한 친구들에게도 귓병을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불구자라는 것을 남에게 알리지 않으려고 그는 사람들을 피했다. 그 무서운 비밀을 그는 혼자서만 부둥켜 안고 있었다. 그러나 1801년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숨겨 둘 수가 없었다. 그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두 사람의 친구, 의사 베겔러와 목사 아멘다에게 고백했다. "나의 사랑하는, 나의 착한, 나의 정다운 아멘다…. 자네가 곁에 있어 주었으면 하고 나는 얼마나 바랐는지 모르네... 자네의 베토벤은 몹시 불행하네. 나의 가장 귀중한 부분, 즉 나의 청각이 많이 약해져 버렸네. 우리들이 함께 지내던 그때부터 벌써 나는 이 병의 징조를 느끼고 있었지만 나는 그것을 감추고 있었네. 그러나 병은 점점 악화되어만 갔다네. 나을 수가 있을는지? 그렇다면야 물론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희망은 거의 없네. 이런 병은 낫기 어려울 것 같네.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피하면서 야속하고 이기적인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가야만 한다는 말인가! 슬픈 체념 -- 나에게는 이것 밖에는 다른 피난처가 없네. 이러한 모든 괴로움을 초월해 보려고 스스로 마음 먹어 보지 않은 것도 아니네. 그러나 그것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베겔러에게는 "나는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네. 거의 2년째 나는 일체 사교를 피하고 있네. "나는 귀머거리요"라고 사람들에게 말 할 수가 없기 때문일세. 내가 다른 직업을 가졌다면 그나마 어떻게 될 수 있으련만. 내 직업으로는 이것은 무서운 처지네. 나의 적들이 무어라고 하겠는가! 그것도 적잖은 수의 적들이!..... 극장에서 배우의 말을 알아들으려면 나는 오케스트라 바로 뒷자리에 앉아야만 하네. 조금만 멀리 떨어져 있어도 악기나 목소리의 높은 음이 들리지가 않네..... 그러나 또 고함을 지르는 소리에는 몸서리가 쳐지네.... 내가 얼마나 여러번 나의 존재를 저주하였는지 모르네!...플루타르코스가 나를 체념으로 인도해 주었다네. 될 수만 있는 것이라면 나는 운명과 싸워 보고 싶네. 그러나 나는 신이 창조한 가장 비참한 인간이라고 느껴지는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네.... 체념! 얼마나 슬픈 피난처인가! 그러나 이것만이 내게 남은 유일한 피난처라네."

<청교도적 생각>

    베토벤의 넋에는 청교도적인 그 무엇이 있었다. 추잡스러운 회화나 사상을 그는 소름이 끼치도록 싫어했다. 모짜르트는 <돈 조반니>를 씀으로써 그의 천재성을 모욕한 것이라고 하여 베토벤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일종의 처녀같은 수줍음을 가지고 일생을 끝마쳤고, 자신의 타락을 자책해야 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아이들에게 도덕을 권하라. 도덕만이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돈이 아니다. 내 경험에 비추어 나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비참한 지경에 빠져 있었을 때 나를 받들어준 것은 도덕이었다. 내가 자살로 인생을 끝마쳐 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내 예술의 덕택이기도 했지만, 또한 도덕의 덕택이기도 하다."  "내가 어디선가, 사람은 아직도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동안엔 스스로 원해서 인생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읽은 일이 없었던들, 나는 벌써 오래전부터 이 세상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도 아마 나 자신의 행위로써."

<베토벤의 근시>

    베토벤의 시력은 천연두에 걸렸기 때문에 약해졌고, 아주 어렸을 적부터 안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눈이 흘기는 듯이 보이게 된 것도 아마 이 근시안 때문이었을 것이다. 1823 - 24년의 그의 서간에는 눈을 앓아 신음하고 있는 것을 하소연한 글이 많다.

<베토벤의 죽음>

    1826년 11월에 베토벤은 늑막염성 감기에 걸렸다. 조카(동생 프란츠의 아들)의 장래를 안정시켜 주기 위해서 겨울에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와 병석에 눕게 되었다. 1827년 2월 17일, 세 번이나 수술을 받고 네번째의 수술을 기다리면서 베토벤은 명랑한 기분으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인내하면서 나는 생각한다. 모든 불행 뒤에는 반드시 좋은 일이 따르는 법이라고." 그 좋은 일이란 죽음의 해방이었다. 운명하던 때에 그가 말한 바에 의하면, '희극의 종결'이었다. -- 차라리 우리는 말하리라. "그의 전 생애의 비극의 종결"이라고.                                                                             

    1827년 3월 26일. 베토벤이 숨을 거두었을 때는 바람 불고 눈보라 휘날리는 가운데 우뢰 소리가 요란하게 천지를 울리고 있었다. 그의 눈을 감겨 준 것은 아무 인연도 없는 알지 못하는 사람의 손이었다.

<폭풍우와 같은 삶>

    베토벤의 전 생애는 폭풍우의 하루와 흡사하다. -- 처음에는 맑게 개인 화창한 아침.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부는 듯 마는 듯, 그러나 벌써 거침없는 대기속에 은은한 위협과 무겁게 뒤덮이는 예감. 갑자기 커다란 그림자가 지나가고 비극적 뇌성, 술렁거리는 무거운 정적에 뒤이어 <영웅>, <제5교향곡>의 휘몰아치는 바람. 그러나 한 낮의 맑은 빛은 그로 인하여 흐려짐이 없다. 기쁨은 여전히 기쁨이요, 슬픔은 꾸준히 희망을 갖고 있다.       

   그러나 1810년 이후 넋의 균형은 깨어진다. 빛은 야릇하게 변한다. 가장 명랑한 사상들로부터조차 수증기 같은 그 무엇이 떠오르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들은 흩어졌다가 다시 뭉쳐져서 난데없이 우울한 어지러움으로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진다. 가끔 음악적 상념이 안개 속으로부터 한두번 솟아 올랐다가 다시금 잠기어 까마득히 사라지고 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맨 나중에 이르러서 다시 한번 그때는 돌풍을 타고 나타나게 될 것이다. 지금은 즐거움까지도 거칠고 야성적인 성격을 띠었다. 열기와 독기가 모두 감정에 섞여든다. 어둠이 내림에 따라  풍운은 몰려 온다. 그러더니 보라! 번개가 번쩍거리고 폭풍우를 실은 저 컴컴하고 무거운 구름들 -- <제9교향곡>의 첫 부분. 갑자기 큰 바람이 최고조에 다다른 가운데 어둠이 찢어지고 밤이 하늘로부터 쫓겨나니, 이리하여 의지의 행위로써 낮은 명랑함이 회복되는 것이다.                                                  

  불행하고, 가난하고, 불구이고, 고독한 사람. 마치 고뇌로써 빚어진 것 같은 사람, 세상에서 기쁨을 거절 당한 그 사람이 스스로 '환희'를 창조한다. -- 그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그는 자기의 불행으로 '환희'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그가 다음과 같은 자랑스러운 말로 표현한 바와 같거니와, 이 말에 그의 생애는 요약되어 있는 것이며, 이 말은 또한 영웅적인 모든 넋의 금언이기도 한 것이다.

   "괴로움을 뛰어넘어 기쁨으로!" (Durch Leiden Freu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