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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ward Gibbon, 로마제국 쇠망사

* 에드워드 기번 - <  18세기 영국의 역사가. 1737년 영국 서리주 퍼트니에서 태어남. 병약한 탓에 웨스트민스터 공립학교를 중퇴했고, 15살이던 1752년에 옥스퍼드 대학의 모들린 칼리지에 입학했으나 14개월만에 그만두었다. 이후 스위스 로잔에 머물며 프랑스어와 라틴어를 마스터했고, 이 시기에 볼테르의 클럽에 드나들며 계몽사상을 흡수했다. 기번은 1764년(27세)에 이탈리아를 여행했는데, 로마에 입성하여 카피톨륨의 폐허를 본 순간 <로마제국쇠망사>를 써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1776년(39세) 2월에 출간된 <쇠망사> 1권은 빅 히트를 쳤다. 1788년 5월 (51세)에 6권까지 출간하여 각권 6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총 6권 3,600페이지의 쇠망사를 20여년에 걸쳐 썼고, 말년에 지병인 음낭수종으로 고생하다 1794년, 5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 로마 제국의 쇠망을 알리는 신호 **

1.  근위대의 방종한 발호는 로마제국의 쇠망을 알리는 첫번째 신호이자 원인이었다.                                                                     근위대는 황제의 악덕을 경멸하기 시작했고, 황제 가까운 곳에 위치함으로써 거리감과 신비감이 가져다주는 권력 주의의 위압감을 우습게 보게 되었다. 풍요로운 도시의 사치스러운 태만에 익숙해 지면서 근위대는 그들의 막강한 힘을 자만했다. 그들은 이제 황제의 신병, 원로원의 권위, 국고, 제국의 중심이 모두 그들 손아귀에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의식했다. 근위대가 딴맘을 먹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굳건한 입지를 다진 현명한 황제들은 명령을 내리면서도 구슬러야 했고, 징벌을 내리면서도 상을 주어야 했다. 근위대의 자부심을 세워주고, 그들의 쾌락을 부채질하고, 그들의 비행을 눈감아주고, 관대한 선물로 그들의 변덕스러운 충성을 사들여야 했다. 

2.  세베루스를 로마제국의 쇠망을 가져온 주된 책임자라고 생각했고, 그것은 정당한 평가였다.                                                      193년 3월 28일, 콤모두스가 사망한지 겨우 86일이 지났을 때, 근위대 병영에서 대규모 소요 사태가 터졌다. 콤모두스가 죽고 새 황제가 된 페르티낙스는 텅빈 국고를 감당하기 위해 근위대에게 약속한 하사금을 지급하기가 어려워졌고, 부당한 국고지출의 요구들을 모두 거부했다. 대중은 그런 조치를 환영했으나, 근위대 병사들은 심술궂고 분노 어린 표정을 지으면서 마음에 가득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시했다. 그들은 새 황제가 옛날의 엄격한 군대 기강을 원상복구시키려 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근위대 병사들은 한낮에 황궁으로 행군했고, 퉁그레스 지방 출신의 한 바바리안이 황제에게 일격을 가했고, 근위병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집단적으로 타격하여 그 자리에서 황제를 죽였다. 브리타니아, 시리아, 일리리쿰의 야전군들은 고상하고 근엄한 페르티낙스의 죽음을 개탄했다. 각 야전군 사령관들(브리타니아의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시리아의 페스케니우스 니게르, 판노니아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은 살해된 페르티낙스의 복수보다는 자신이 황위에 오르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았다. 아프리카출신인 세베루스는 개인적 영예를 쌓으며 승진을 계속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도발적인 야심을 잘 감추었다. 피르티낙스의 살해 소식을 접하자 그는 부하 군인들을 모아놓고 근위대의 범죄, 오만, 허약함을 생생하게 설명한 뒤 휘하 3개 군단의 병사들에게 일제히 궐기하여 복수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그는 열광적인 웅변 끝에 각 병사들에게 400파운드의 은사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400파운드는 율리아누스가 제국을 사들이기 위해 근위대의 각 병사들에게 약속한 금액보다 두 배나 많은 거액이었다. 세베루스는 그가 담당하는 판노니아(도나우 강변지대)에서 로마로 급속 행군을 하여 열흘 안에 로마에 당도했다.        

          세베루스는 로마제국을 자신의 개인재산으로 생각했고, 그 재산의 소유권을 안전하게 확보하자, 그 귀중한 물건의 가치를 높이는 일에 몰두했다. 그는 정부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던 권력 남용의 사례들을 바로잡았다.  세베로스는 상당한 능력과 활력을 갖고 있었지만,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과감한 정신, 아우구스투스의  절제 정책만으로는 내전에서 연달아 승리한 군대의 교만함을 억누르기 어려웠다. 세베루스는 군대에 대한 감사함, 잘못된 정책, 상황에 의해 강요된 필요성 때문에 군대의 기강을 어느정도 완화할 수 밖에 없었다. 허영심이 많아진 병사들은 황금반지(원래 부유한 시민들에게만 허용되었던 특권)를 끼었다. 병영에 아내를 데려와 함께 살도록 허용하면서 그들은 더욱 태만해졌다. 세베루스는 그들의 봉급을 예전의 기준보다 훨씬 높게 책정해 주었고 하사금을 자꾸 주다보니 군인들도 국가의 위기나 축제때에는 당연히 하사금을 기대했고 나아가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성공에 도취되고, 사치로 인해 무기력해지고, 위험스러운 특권에 의해 일반시민들보다 더 높은 계급이 되어 버린 군인들은 곧 힘든 군사훈련을 게을리 하게 되었다. 그들은 백성을 압박하는 존재로 변했고,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고깝게 여겼다. 장교들은 더 크고 더 멋진 사치를 요구하면서 계급적 우월성을 과시했다. 이렇게 하여 예전의 근위부대가 다시 들어서게 되었고, 이 총애받는 위세 당당한 부대의 사령관직은 황제 다음으로 높은 직책이 되었다. 정부 형태가 군사정부로 타락하자, 근위대 사령관은 군대의 총사령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재무와 법률의 다른 분야까지 총괄했다.         

** 제1권 1장  '두 안토니우스 황제 시대의 로마제국 판도'**             

*    로마인들의 주된 정복 사업은 공화국 시절에 이미 완성되었다. 대부분의 황제들은 제국의 판도를 현상유지하는 것에 만족했는데, 그 방대한 판로는 원로원의 정책, 집정관들의 경쟁, 로마인들의 상무(尙武) 정신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획득한 것이었다. 로마는 건국 이후 첫 700년 동안 승전을 거듭하며 정복사업을 계속해 왔으나,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들어오면서 온 세상을 정복한다는 장대한 목표를 마침내 포기하게 되었다. 그대신 현상유지와 절제의 정신이 제국의 국론이 되었다. 자신의 기질과 시대상황 때문에 평화를 사랑하게 된 아우구스투스는 이미 엄청난 영광을 누리고 있는 로마제국이 계속 무력 원정을 벌일 경우 이득보다 손실이 더 많다고 판단했다. 아주 멀리까지 가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갈수록 어려워졌고, 그 결과도 의심스러워졌으며, 점령은 더 위험한 반면 그에 따른 혜택은 점점 적어졌다.

*    로마군대의 가공할 힘은 황제들의 절제정책에 위엄과 무게를 실어주었다. 황제들은 끊임없이 전쟁 준비를 함으로써 평화를 보존했다. 그들은 정의에 입각하여 행동하면서, 변경의 부족들을 모욕하지도 않겠지만 그렇다고해서 그들의 제국 모욕행위를 용납하지도 않겠다고 선언했다. 

* 로마제국의 군대  - 공화정을 유지하던 시대에는, 시민들만이 무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 시민들은 나라를 사랑했고 지켜야 할 재산이 있었으며 그들이 의무적으로 단속하고 수호해야 하는 법률의 효력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정복사업이 확대되면서 공공의 자유는 점점 상실되었고, 그에 비례하여 전쟁은 하나의 기술로 발전하더니 종내에는 직업적인 일로 전락했다. 병사들은 멀리 떨어진 속주에서 징집할 때도, 로마군대는 당연히 로마시민으로 구성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다. 이러한 전제는 일반적인 법률적 자격요건이었고, 군인에 대한 적절한 보상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군인을 뽑을때, 그런 이상적 전제보다는 나이, 신체적 힘, 군사적 능력 등 본질적 자격을 점점 더 고려하게 되었다. 그후 재산상태에 대한 자격요건이 완전히 철폐되자, 장교들은 대부분 좋은 집안과 교육환경에서 태어나 성장한 사람들이었던데 비해 일반병사들은 야비하고 때때로 방탕한 사람들이 많았었다.

      전제군주 밑에서 돈 받고 싸우는 용병들은 의무감이 없었고 그런 정신을 대단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이때문에 그들의 정신적 결핍을 메우기 위해서 그보다는 힘이 좀 떨어지는 다른 정신적 요소들, 즉 명예와 민간 신앙을 동원해야 했다. 이제 로마 군대는 명예와 민간 신앙의 단합된 힘에 의해 군기를 유지했다. 병사들은 군단의 맨 앞에서 번쩍거리며 나부끼는 황금 독수리 군단 깃발을 보며 신앙에 가까운 충성심을 느꼈다. 위험한 순간에 군단 깃발을 내팽개치는 것은 불경할 뿐만 아니라 치욕스러운 행위였다. 이런 정신적 동기들은 좀더 물질적인 성격을 띠는 공포와 희망에 의해 강화되었다. 정기적 봉급, 산발적 보너스, 일정 연공에 따른 특혜 등의 물질적 혜택을 제공해 군 생활의 어려움을 완화시켜주는 한편, 비겁과 불복종에는 엄중한 징벌을 부과했다. 장교는 병사를 구타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고, 장군들은 병사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다. 훌륭한 병사는 적보다 아군의 장교를 더 무서워해야 한다는 것이 로마 군대의 격언이었다. 이런 훈련 덕분에 로마군대는 상당히 위력적인 군인정신(강인함과 복종심)을 갖추게 되었다. 이것은 격정적이고 불규칙한 열정을 가진 바바리안의 군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특징이었다.

      로마인들은 기술이나 훈련이 뒷받침되지 않은 용기는 불완전한 것이라고 보았고, 군대를 가리키는 라틴어 <엑세르키투스 exercitus> 역시 훈련을 뜻하는 단어에서 차용한 것이다. 신병이나 초년병은 아침저녁으로 끊임없이 훈련을 받았고, 고참병이라고 해서 날마다 반복되는 훈련에서 면제되지 않았다. 겨울철 주둔지 병영에는 규정에 따라 막사가 세워졌고, 아무리 비바람 치고 궂은 날씨라고 해도 훈련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각종 훈련 설비를 갖추고 있었다.

** 2장  안토니우스 시대의 내부 번영 **                                                                                                                                  로마제국의 단단한 구조와 힘은 여러 시대에 걸쳐 다져진 지혜로 강화되고 보존되었다. 

* 로마제국의 종교정책 *                                                                                                                                                                  황제들과 원로원의 종교 정책은 다행스럽게도 현명한 일반 대중의 조언과 미신적인 대중들의 습관을 잘 이해하고 그것을 허용하는 것이었다. 로마세계 내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종교들이 번성했다. 대중에게 그것은 모두 동등하게 진실한 것이었으나, 철학자들은 그것을 모두 거짓된 것이라고 비판했고, 행정가들에게는 모두 유익한 것이었다. 이러한 종교적 관용은 상호인정의 태도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제국내의 종교적 일치마저 가져왔다. 

    어떻게 해서 로마에 종교 박해의 사상이 도입되었는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행정관들이 맹목적이고 순진한 고집에 휘둘렸을 것 같지는 않다. 왜냐면 행정관들 자신이 철학공부를 많이 한 철학자였기 때문이다. 세속적 권한과 사제적 권한이 같은 손에 집중되어 있었으므로 행정관들이 야망이나 탐욕때문에 종교 박해에 나섰을 것 같지도 않다.  

    제국의 수도인 로마는 세계 각 지역에서 온 신하들과 이방인들로 넘쳐났는데, 이들은 자기 고장의 미신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로마에 소개하기까지 했다. 제국의 모든 도시들은 조상 전래의 종교를 그대로 유지했다. 로마 원로원은 때때로 그 특권을 사용하면서 외국의 종교 의식이 로마에 범람하는 것을 견제하기도 했다. 특히 가장 하찮고 경멸스러운 것으로 여겨지던 이집트 미신은 자주 억압을 받았다. 

* 로마제국의 융합정책 *                                                                                                                                                                외국 것들의 혼입을 억제하는 순혈주의 정책은 고대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행운을 가로막았고, 결국에는 그들의 멸망을 가져왔다.  로마제국은 놀라운 천재성을 발휘하여 허영보다는 야망을 중시했고, 그들이 점령한 나라의 미덕과 장점을 수용하는 것이 현명할 뿐만 아니라 명예로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설사 그 좋은 점들이 노예와 이방인들, 적들과 바바리안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것이라 해도 개의치 않았다.

    이탈리아인들의 재산은 과세에서 면제되었고, 그들의 신병은 속주 지사들의 임의적인 사법권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이탈리아인으로 출생한 사람들은 모두 로마인의 자격을 부여받았다. 하지만 로마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태어났다는 구분은 점차 철폐되어 하나의 거대한 나라에 부지불식간에 편입되었다. 그 나라는 언어, 풍속, 민간제도등이 통합되어 있었으며 거대한 제국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공화국은 관대한 정책을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겼고 빈번하게 속주들의 충성심과 봉사정신으로 보답받았다.  

    제국의 속주들은 군사력이나 제도적 자유가 결핍되어 있었다. 에투루리아, 그리스, 갈리아 등지와 관련하여 원로원이 가장 신경 쓴 부분은 그들의 위험한 연합체를 해산시키는 것이었다. 로마인들이 속주들의 분열로 승리한 것처럼, 속주들이 단합하면 얼마든지 로마인들에게 저항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속주의 원래 통치자들에게는 감사와 관대함의 표시로 잠시 그 지위에 남아 있게 해주었지만, 로마가 내려준 멍에에 그 속주를 잘 적응시키는 임무가 완료되자마자 통치자 혹은 왕의 자리에서 쫓아냈다.  로마의 대의를 포용했던 자유국가나 도시들은 명목상으로는 동맹국의 지위를 부여받았으나, 곧 예속의 상태로 추락했다.  속주들에서 로마인의 국가가 서서히 형성되었는데, 그 이유는 첫째 그곳에 식민지를 건설했기 때문이고, 둘째 충성스럽고 자격있는 속주민들에게 로마인의 자유와 권리를 부여했기 떄문이다. 

      "로마가 정복한 지역은 어디든 로마인이 거주한다." 세네카가 한 이말은 역사와 경험을 통해 확인된 사실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쾌락과 이득의 유혹에 이끌려 승리의 결과물을 챙기기 위해 달려갔다. 자발적으로 해외로 나간 로마인들은 대부분 상업, 농업, 영리 농장에 종사했다. 하지만 황제의 명령으로 속주들이 영구 거주지가 되면서 군인들이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고참군인들은 토지나 금전으로 군 복무에 대한 보상을 받으면 가족들과 함께 그들이 명예로운 젊은 시절을 보낸 그 고장에 정착했다. 제국 전역에서 식민지가 건설되었으나, 특히 비옥한 땅이 많은 서부지역이 식민지 후보로 더 적절했다.

** 라틴어와 그리스어 **                                                                                                                                                                   언어가 국가의 풍습에 미치는 영향을 잘 알았던 로마인들은 무력으로 진압한 곳에서 라틴어의 사용을 확대하려고 노력했다. 

    정복자 로마는 그리스의 예술에 정복당했다. 근대 유럽에서 여전히 존경받고 있는 고대 그리스의 저술가들은 곧 이탈리아와 서부 속주들에서 면학과 모방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로마인들의 이런 예술 취미는 그들의 건전한 정복 정책에 지장을 주지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 문화의 매력을 인정하는 동시에 라틴어의 위엄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그 결과 민간 행정과 군사 행정에서는 라틴어가 배타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리스어와 라틴어는 제국 전역을 통하여 서로 다른 관할 지역을 갖고 있었다. 그리스어가 학문의 언어였다면 라틴어는 법률과 공공 거래의 언어였다. 학문과 상업의 두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은 두 언어 모두 능통했다. 속주의 어느 지역에서 살든 교양 있는 로마인이라면 이 두 언어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고대의 자유로운 국가들에서도 가내 노예들은 가혹하고 방종한 횡포에 노출되었다. 폭력과 파괴의 시대가 지나가자 그 다음엔 로마제국이 정착했다. 노예들은 대부분 바바리안 포로들이었는데 전쟁통에 헐값에 팔린 자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노예가 되기 전부터 독립적인 생활에 익숙했기 때문에 노예의 족쇄를 부수고 복수를 하려는 마음이 가득했다. 

    그러나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주요 국가들이 제국의 법률에 복종하게 되자, 해외 노예들의 공급은 전보다 훨씬 줄어들었다. 그리하여 로마인은 전보다 덜 난폭하지만 동시에 따분한 방식인 노예들의 번식을 장려하게 되었다. 로마인들의 무수한 가정에서, 특히 그들의 전원 별장에서, 노예들 사이의 결혼을 권장했다. 자연스러운 애정의 느낌, 교육에 의해 형성된 습관, 처자식이라는 부양가족이 있다는 인식은 노예생활의 어려움을 어느 정도 완화해 주었다. 로마 가정에서 노예는 상당히 값 나가는 재산이었다. 주인의 인심은 노예에 대한 공포로 억제되기 보다는 노예를 잘 거두어야 재산 가치가 높아진다는 생각으로 촉진되었다. 오래 전부터 있어왔고 남용되었던 노예에 대한 생사여탈권은 개인의 손에서 박탈되어 오로지 행정관만이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지하 감옥은 철폐되었다. 가혹행위가 있었다는 증거를 제시할 경우, 부상당한 노예는 구제를 받거나 아니면 덜 잔인한 주인에게 넘겨졌다.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과세를 위한 인구조사를 실시했을 때, 로마제국의 시민 수는 694만 5천명이었다. 여기에 그들의 아내와 자식까지 감안하면 인구는 2,000만명 수준에 이르렀을 것이다.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절에 로마 시민보다 두 배나 많은 남녀노소 속주민들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노예의 수는 로마 세계에 살고 있는 자유민들의 수와 비슷했을 것이다. 이런 불완전한 계산에 따르면 로마 세계에는 약 1억 2,000만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가정의 평화와 단합은 로마인들이 추진한 온건하면서도 포용적인 정책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 3장 안토니우스시대의 국가제도 **                                                                                                                                                군주제의 정의는 이렇게 내릴 수 있다. <그 통치자가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간에 단 한사람에게 법률의 집행, 세수 관리, 군대의 통솔 권한이 부여된 국가 체제>라고 말이다.    미신의 시대에 사제의 영향력은 인간의 권리를 보장하는데 유익하게 사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왕좌와 제단의 관계가 밀착되어 있어서 교회의 깃발이 민중의 편에서 펄럭거린 적은 거의 없었다. 호전적인 귀족과 완고한 평민들이 그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무기를 갖추고 제도의 틀 속에서 뭉쳤을 때에만 군주의 전횡에 맞서서 자유로운 제도를 보존할 수있었다

  *    악티움 해전의 승리 이후 로마 세계의 운명은 옥타비아누스의 의지에 달여 있었다. 그는 숙부의 이름을 따서 '카이사르'라는 칭호를 사용했고, 후에 아첨하는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신성하게 축복 받은자' 혹은 '거룩한 자')라는 별도의 명칭을 부여받았다. 

      이때 그(아우구스투스)의 명칭은 속주 총독(프로콘술) 겸 최고사령관(임페라토르)이었고, 이 직책을 10년만 수행하겠다는 조건을 달았다. 이 기간이 끝나기 전에도, 그는 내전의 상처가 완전히 치유되고 공화국이 원래의 건강을 되찾으면 이런 막강한 권한을 가진 행정관을 둘 필요는 없을 것이라는 희망을 피력했다. 코미디나 다름없는 이런 희망의 발언은 아우구스투스의 생애 내내 여러 번 되풀이 되었다. 이 코미디는 말대의 황제에 이르기까지 장엄한 의식속에서 반복되었는데, 로마 황제들은 그들의 통치 10주기를 엄숙하게 거행하면서 아우구스투스가 한 말을 되풀이 했다. 

    집정관(콘술)은 고대 로마의 왕정이 폐지되면서 생겨난 직책으로 국가의 위엄을 상징했다. 집정관은 종교 의식을 감독하고, 군대를 징발하고 통솔했으며, 외국의 사절을 접견했고, 원로원과 민회의 사회를 보았다. 또한 국가 예산을 전반적으로 통제했다. 집정관은 직접 재판을 주재할 시간적 여유는 없었지만 법률, 공안, 공정의 최고 재판관으로 인정되었다. 이상은 집정관의 통상적인 소관사항으로, 원로원이 공화국의 안위를 위해 집정관에게 비상 대권을 부여할 경우 집정관은 잠정적으로 초법적인 독재를 행사할 수 있었다.

    호민관(트리부누스 플레비스)과 집정관은 여러면에서 달랐다. 호민관은 외양이 수수하고 겸손했지만 집정관은 신성불가침의 존재였다. 호민관의 권력은 어떤 행동을 일으키기 보다는 반대하며 견제하는 야당의 역할에 가까웠다. 호민관 직책은 억압받는 자들을 보호하고, 죄지은 자를 사면하고, 대중의 적을 고발하기 위해 설정되었다. 그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국가 행정을 중단할 수도 있었다. 공화국은 집정관과 호민관의 직책에서 발생하는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한 장치를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선임된 해에만 그 직책에서 근무했다. 집정관직은 2명, 호민관직은 10명이 맡았다. 

      황제들에 대한 신격화 작업은 황제들 자신이 평소의 신중함과 절제 정신에서 벗어난 유일한 사례였다. 이 비굴하고 불경한 아첨의 형태를 처음 고안한 것은 소아시아에서 살았던 그리스인들이었는데, 이들이 신격화한 대상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들이었다. 이 관습은 왕들에게서 소아시아의 총독들에게 쉽게 전파되었다. 소아시아 지방에 나가 있던 로마 행정관들은 종종 그 지방의 수호신으로 숭앙되었고, 그들을 위한 제단과 신전이 건립되어 희생과 축제가 벌어졌다. 지방 총독들이 받아들인 것을 황제가 다시 받아들이는 건 당연하고 자유로운 일이었다. 그리하여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살아 생전에 로마 수호신의 지위를 부여받는 것에 동의했다. 하지만 온건한 성품을 지닌 그의 후계자(아우구스투스)는 그런 위험한 일을 살아 생전에 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런 서양의 관습은 후대의 황제들도 그대로 따랐으나 광기에 휩싸인 칼리굴라와 도미티아누스는 예외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지방 도시들에서 그의 명예를 선양하기 위해 신전을 건립하는 것은 허용했다. 단, 그 신전에서는 주로 로마 예배를 하고 황제에 대한 예배는 간략하게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그는 자연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민간 미신은 허용했다. 그 외에는 인간의 몸으로 원로원과 시민의 존경을 받는 것으로 만족했고, 현명하게도 자신에 대한 공식적 신격화는 사후에 후계자들이 알아서 하도록 미루었다. 그리하여 폭군이 아닌 경우, 모든 황제들은 사망 즉시 원로원의 엄숙한 선언에 의해 신으로 높여졌다. 이러한 신격화 의식은 장례식과 동시에 집행되었다. 

    아우구스투스의 본명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옥타비아누스였고, 아리키아라는 작은 마을의 빈한한 가문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그는 독재장의 양아들로 들어가 '카이사르'라는 멋진 성을 얻었다. 기원전 27년 1월 16일에 원로원은 제국의 최고사령관에게 새로운 칭호를 붙여주자고 제안했다. 진지한 논의 끝에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이 채택되었다. 그것은 그가 일관되게 흉내냈던 평화와 신성함의 특징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이름이었다. 이렇게 하여 아우구스투스가 이름, 카이사르가 성이 되었다이름은 그가 사망하면서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지만, 성은 입양과 외가를 통하여 확산되었고, 네로는 율리우스 가계의 적통을 주장할 수 있는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네로 사망 당시에 카이사르가 황제의 이름과 동일시되는 전통이 무려 1세기나 지속되었다.  이 때문에 로마 공화국의 멸망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로마, 그리스, 프랑크, 독일 등의 황제들은 카이사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 6장 카라칼라의 포악과 엘라가발루스의 황음**                                                                                                                            콤모두스의 방종한 폭정, 그의 죽음에 의해 촉발된 내전, 세베루스 가문이 도입한 군 우대정책 등은 군대의 위험스러운 권력을 더욱 키워주었고, 로마인들의 마음속에 아직도 남아있는 법률과 자유의 기억을 말살시켰다.             

    로마와 이탈리아가 행정의 중심지로 존경받는 한, 국가의 기반은 오래된 로마인과 최근에 자격을 획득한 로마인들에 의해 보존되었다. 군대의 주요 지휘관 자리는 자유로운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차지했고, 고위 장교들은 법률과 규정의 이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민간과 군사 부문의 영예직을 거쳐서 차근차근 그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영향력과 모범덕분에 로마 제국의 첫 200년 동안 군단들은 그나마 명령에 복종했다.     

    하지만 로마 정체의 마지막 울타리를 카라칼라가 무참히 짓밟으면서 문관과 무관의 구분은 점차 서로 다른 계급으로 굳어졌다. 내부 속주들의 세련된 시민들만이 법률가와 행정관의 자격을 획득했다. 거친 군인 직업은  농민과 변경의 바바리안들에게만 돌아갔다. 군인들은 국가는 알지 못하고 소속부대만 알았고, 민간 법률에는 무지하고 오로지 전쟁 기술만 익혔으며, 군사적 기강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들은 때때로 피 묻은 손, 야만적 행동, 절망적인 결단으로 황제의 지위를 지켰으며 때로는 그것을 전복하였다.

** 7장 막시미누스의 학정과 죽음**                                                                                                                                                 예전의 폭군들인 칼리굴라, 네로, 콤모두스, 카라칼라는 모두 방탕하고 경험 없는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황족으로 태어나 교육을 받았고, 제국의 자부심, 로마의 사치, 아첨의 유해한 목소리에 의해 타락했다. 

    제국의 모든 도시는 독립 예산을 가지고 있어서 이 돈으로 백성들을 위한 양곡을 사들이고 스포츠 게임과 오락행사의 비용을 지원했다. 

    건국 이래 첫 400년동안 로마인들은 가난에 시달리면서 전쟁과 정부의 미덕을 획득했다. 그후 로마인들은 과감하게 용기를 발휘하고 운명의 도움을 받아 300년동안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많은 국가들에 절대 제국을 수립했다. 마지막 300년은 화려한 번영과 내부 쇠퇴의 길을 걸었다. 로마인 35개 부족으로 이루어진 군인, 행정관, 법률가의 나라는 거대한 인류의 덩어리 속으로 용해되었고, 로마인에 걸맞은 고상한 정신은 없이 로마인이라는 외적 자격만 획득한 수백만 명의 예속적인 속주민들과 혼융되었다. 변경의 주민들과 바바리안들 사이에서 징발된 용병부대는 그들의 독립적 지위를 보존하고 남용하였다. 소란스러운 정변에 의하여 시리아인(엘라가발루스), 고트인(막시미누스), 아랍인(필리푸스)이 로마제국의 황위에 올랐고, 방대한 제국의 정복지역과 스키피오 부자(父子)의 나라에 전제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로마제국의 변경은 아직도 북대서양에서 티그리스 강에 이르고, 아틀라스 산에서 라인 강과 도나우 강까지 뻗쳐 있었다. 우매한 대중들의 눈에 필리푸스는 하드리아누스나 아우구스투스 못지 않게 강력한 황제로 보일 것이다. 비록 외적인 형태는 그대로였으나 내적인 건강과 활기는 사라졌다. 일련의 오랜 압박으로 인해 백성들의 사기는 떨어졌고 기력은 고갈되었다. 다른 모든 미덕이 사라진 이후 오로지 혼자서 위대한 제국을 떠받치고 있던 군단들의 기강은 황제들의 야망에 의해 부패하거나 아니면 황제들의 허약함으로 인해 헤이해졌다. 축성보다는 무기에 의존했던 변경의 수비는 크게 약화되었다. 아름답고 비옥한 속주들은 바바리안들의 파괴 혹은 야망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바바리안들은 곧 로마제국의 쇠퇴를 목격하고 엉뚱한 야심을 품게 된다.

 

  ** 8장 페르시아의 종교와 정치 **                                                                                                                                                    아우구스투스에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에 이르는 동안 로마의 적들은 그 내부에 있었고, 대체로 폭군과 군인들이 주된 적이었다. 로마의 번영은 라인 강과 유프라테스 강 너머에서 벌어지는 정변과는 별 관계가 없었다. 로마군대가 무질서를 자행하며 황제의 권력과 원로원의 법률을 파괴하고 심지어 군의 기강을 헤이하게 만들면서, 변경지역에서는 오랫동안 준동해왔던 북부와 동부의 바바리안들이 쇠퇴하는 제국의 속주들을 공격했고 종내에는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동부에서는 사산왕조의 창건자인 아르다시르(재위 211~241년)가 이중의 왕관을 대관했고, 예전의 왕들이 사용했던 샤한샤(왕중 왕)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하지만 이런 거창한 타이틀은 페르시아 왕의 허영을 만족시켜주기 보다는 그의 의무를 더욱 강화했고, 기원전 6세기의 대왕인 키루스의 종교와 제국을 화려하게 부활시켜야 한다는 야망을 부채질했다.     

** 페르시아의 종교 **                                                                                                                                                                            페르시아가 마케도니아와 파르티타의 굴레에 오래 예속되어 있던 동안에 유럽과 아시아의 민족들은 상대방의 신앙을 받아들여 부패시켰다. 아르사케르 왕조도 마기교의 신앙을 받아들였으나 다양한 외국의 우상 신들을 혼융하여 그것을 오염시켰다. 고대 페르시아의 예언자요 철학자인 조로아스터는 아직도 동방에서 존경받고 있었다. 하지만 조로아스터교의 경전인 젠다베스타는 신비한 폐어(廢語)로 쓰여 있어 해석에 따라 여러 종파로 갈리게 되었다. 

            조로아스터교의 가장 근본적인 교리는 저 유명한 이원(二元)론이다. 동방의 철학은 도덕적, 구체적 악의 존재를 자비로운 창조주의 선성(善性)과 일치시키려는 과감한 시도를 했다. 우주를 창조한 최초의 오리지널한 존재는 조로아스터교의 경전에서 '끝이 없는 시간'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이 무한의 실체는 자의식이나 완벽한 도덕성을 갖춘 실재하는 실체라기 보다 정신의 형이상학적 추상에 더 가깝다. 그리스의 카오스 개념과 유사한 이 '무한의 시간'의 맹목적 혹은 지적인 작용으로부터 우주를 움직이는 2개의 이차적 원리가 생겨났다. 바로 오르마즈드(선의 신)과 아흐리만(악의 신)이다. 이 두 원리는 창조의 힘을 갖고 있는데, 그 불변의 특성상 서로 다른 의도를 가지고 그 힘을 사용한다. 선의 원리는 영원히 빛속에 깃들어 있지만, 악의 원리는 영원히 어둠속에 묻혀 있다. 오르마즈드는 미덕을 가진 인간을 창조하고 그의 거처에 많은 행복의 물질을 제공한다. 그의 엄격한 섭리 아래 별들의 운행, 계절의 질서, 지(地)수(水)화(火)풍(風)의 적절한 배합등이 유지된다. 그러나 아흐리만의 악의는 이미 오래전부터 '오르마즈드의 달걀'을 뚫어 왔다. 달리 말해서 선신(善神)이 이루어 놓은 많은 일들의 조화를 깨뜨리는 것이다.         

    모든 종교는 신자의 마음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 위하여, 첫째 합리성과는 상관없는 예배의 반복적 실천을 부과하여 복종을 강요하고, 둘째 인간의 내면적 양심과 비슷한 도덕적 의무를 주입하여 신자들의 존경심을 불러일으킨다. 조로아스터교 또한 예배의 반복적 실천을 강력하게 주문하고 도덕적 의무사항들을 규정해 놓고 있다.       

** 9장   게르마니아의 문화와 풍습 **                                                                                                                                                전쟁을 좋아하는 게르만족은 처음에는 로마제국에 저항했고, 이어 제국을 침략했으며 종내에는 서로마제국을 멸망시켰다.        

    근대 유럽의 가장 문명화된 국가들은 게르마니아의 삼림지대 출신이다. 우리는 이 바바리안들의 조잡한 제도에서 오늘날의 법률과 풍습의 원형을 볼 수 있다. 통상 게르만족이라고 하면 고트족, 프랑크족, 색슨족, 바바리아족을 가리키는데, 고트족은 다시 서고트족과 부르군트족과 동고트족으로, 프랑크족은 살리족, 리부아리아족, 참비아족, 튀링기아족으로, 색슨족은 색슨족, 앵글로-색슨족, 프리지아족, 랑고바르드족으로 그리고 바바리아족은 알라마니족과 바바리아족으로 나뉜다.  

    문자의 사용은 문명화된 민족과 지식이나 반성을 모르는 바바리안들을 구분 짓는 중요한 기준이다. 고대의 게르만족은 이 문자 기술이나 각종 기술이 한심할 정도로 결여되어 있었다. 그들은 무지와 가난속에서 하루 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런 상태를 덕성스러운 단순함의 생활이라고 칭송하기도 했다. 

    게르만족은 엄청나게 큰 삼림을 사냥터로만 이용했고, 상당히 넓은 땅을 목초지로 사용했으며, 그 외의 좁은 땅에다 조잡한 형태의 경작을 허용했다. 기근이 재발하여 농업 기술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면 청년 인구의 1/3 혹은 1/4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킴으로써 문제를 해결했다. 재산의 소유와 활용은 문명화된 민족을 더 좋은 나라에 묶어두는 연결고리다. 하지만 게르만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 가령 무기, 가축, 여자들만 있으면 광대한 삼림지대를 기꺼이 버리고 약탈과 정복의 무한한 희망을 가지고 다른 곳으로 떠나갔다.

<재산보다 자유를 사랑한 게르만족>

    도시도 문자도 화폐도 없이 전쟁만 좋아하는 게르만인들은 자유의 향유라는 야만적 상태로부터 물질적 결핍에 대한 보상을 얻었다. 가난이 그들의 자유를 보장해 주었다. 왜냐하면 우리의 욕망과 우리의 소유물이 전제주의의 강력한 족쇄를 견디게 해주는 힘이기 때문이다. 자유를 사랑하는 게르마니아의 대부분 지역에서 정부 형태는 민주제였다. 이 정부는 보편적이고 능동적인 법률에 의해서 조절되거나 통제된다기보다 출생 신분, 용기, 웅변술, 혹은 신앙 등에 의해 통제되었다. 

    게르만인들의 의결사항은 대부분 성급하고 난폭한 것이었다. 현재의 열정을 만족시키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고, 장래의 결과를 무시해 버리는 것을 용기라고 보는 이 바바리안들은 정의와 정책의 이름으로 반론을 제기하면 분노와 경멸을 표시하며 외면했다. 그러나 인기있는 웅변가가 대내외적으로 모욕을 받은 동포를 설욕하자고 제안하거나, 민족의 명예를 주장하자고 소리치거나, 위험과 영광이 가득한 모험을 벌이자고 요청하면,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요란하게 창과 방패를 부딪치면서 찬성의 뜻을 표시했다. 게르만인들은 언제나 무기를 소지한 채 회의에 참석했는데, 당파심과 강력한 주정(酒精)에 불타오른 무절제한 군중이 난폭한 결의를 선언하거나 강요하는 것이 아닐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인신(人身)을 소중하게 여기고 재산을 티끌처럼 보는 게르만인들은 각종 기술이나 노력은 보잘것 없는 수준이었지만, 명예심과 독립심만은 드높았다. 게르만인은 자기가 스스로 부과한 의무만 존중했다. 가장 낮은 병사조차도 행정관의 권위를 우습게 보면서 저항했다. 이러한 제도는 여러 공화체제를 부수적으로 허약하게 만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게르만인의 일반적 특성을 활성화시켰고, 바바리안들이 민감하게 생각하는 미덕들, 가령 의리와 용기, 환대와 예절 등을 더욱 강화했다. 이러한 특성은 기사도 시대가 지나간 지 오래된 후에도 게르만 민족에게 남아 있었다.

<게르만족의 여성들>

    "기사도 시대에 혹은 로망스 시대에 모든 남자는 용감했고, 모든 여자는 정숙했다." 정숙은 용기보다 훨씬 어렵게 획득, 보존되는 미덕이기는 하지만, 고대 게르만족의 아내들은 정숙했다고 전문가들은 예외 없이 말한다. 중혼은 통치자들 사이에서만 있었고 그것도 다른 부족과의 동맹을 꾀하기 위한 정략결혼의 결과였다. 이혼은 법률보다는 풍습에 의해 금지되었다. 간통은 용서받지 못하는 희귀한 죄악으로 처벌되었다. 여성을 유혹하여 농락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용납되지 않았다

    게르만족의 세련되지 못한 아내들은 가난하고 고독했을 뿐만 아니라 가정생활을 힘들게 꾸려나가야 했다. 사방이 터져 있어서 호사가나 질투심 많은 자가 언제나 들여다 볼 수 있는 게르만 오두막은 높은 벽, 빗장, 페르시아의 하렘의 환관들보다 더 훌륭하게 부부의 정절을 지켜주었다. 여기에 명예로운 이유 한가지를 추가해야 할 것이다. 게르만족은 그들의 아내를 존경하고 신임했으며 중요한 일은 모두 상의했다. 그들은 여성의 유방에는 인간 이상의 신성함과 지혜가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여성들은 병사들의 자유롭고 동등한 동지로 존중되었고, 결혼한 후에는 노고, 위험, 영광의 생활을 공유했다. 

      그들이 대규모 공격을 감행할 때 게르만족의 캠프에는 많은 여성들이 따라왔다. 그들은 전장의 혼란스러운 소음에도 당황하지 않았고 온갖 형태의 파괴를 견뎌냈으며 남편과 아들의 영광스러운 상처를 묵묵히 지켜보았다. 사기가 떨어진 게르만 병사들이 캠프로 돌아왔다가 적들을 향해 다시 달려나간 것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죽음보다 예종을 더 싫어하는 여자들의 절망적인 시선을 보고 용기를 냈던 것이다. 만약 그날의 패배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면, 게르만 여자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았다. 그들은 모욕을 가하는 승자의 손아귀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자신과 자식들을 자기 손으로 죽여버렸다.

    이런 성격을 가진 여주인공들은 우리의 감탄을 자아내겠지만, 그들은 사랑스럽지가 않았고 또 사랑에 별로 섬세하지도 않았다. 게르만 여성들이 남자들의 용기를 닮으려고 애를 썼기 때문에 여성의 매력과 아름다움이 깃드는 저 매력적인 부드러움은 포기했다. 게르만 여성들은 자부심을 더 중시했기 때문에 명예에 장애가 되는 모든 부드러운 감정을 억압했다. 게다가 여성의 첫번째 명예는 언제나 정절의 명예였다. 이 고상한 기혼 부인들의 정서와 처신은 곧 게르만족의 보편적 특징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었다. 

<게르만족의 종교>       

      게르만족의 종교는 결핍, 공포, 무지로부터 생겨났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거대한 대상과 해, 달, 불, 흙 같은 자연요소를 중시했다. 그 외에 인간생활의 중요한 직업을 관장한다고 생각되는 신들을 예배했다. 그들은 복점술을 통해 창조주의 의지를 알아낼 수 있다고 믿었으며, 인간을 희생물로 바치는 것이 신들의 제단에서 값 나가고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르마니아의 유일한 신전은 오래된 깊고 어두운 숲이었고, 숲에 대한 경배는 그 위의 세대들도 한결같았다. 숲에는 신비한 어둠이 있었고, 보이지 않는 신들이 거처하고 있었으며, 공포나 예배의 구체적 대상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에 게르만족의 마음에 더욱 깊은 종교적 공포감을 주었다. 게르만 사제들은 비록 투박하고 문자를 몰랐지만, 게르만족의 적성에 알맞은 깊은 종교적 외경심을 보존하고 강화하는 기술들을 경험 법칙에 의해 개발했다.    

    기후, 학식, 기술, 법률의 결핍, 명예심과 상무정신, 종교관, 자유를 사랑하는 태도, 평화를 싫어하고 전쟁을 좋아하는 정서등이 군사적 영웅들로 가득한 민족을 만들어냈다.

**10장 치욕과 불운의 20년**

<고트족>                                                                                                                                                                               우크라이나의 새 정착지에 자리를 잡은 고트족은 곧 흑해의 북쪽 해안에서 맹주가 되었다. 그 내륙의 바다 남쪽에는 부유하고 풍요로운 소아시아의 여러 속주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속주들은 필연적으로 바바리안 정복자들을 유혹했다. 그리하여 고트족은 소아시아의 여러 도시들을 약탈하고 그리스를 파괴했으며, 나아가 이탈리아를 위협했다. 

** 13장 디오클레티아누스와 3명의 공동 황제 **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부모는 한미한 사람들로서 로마 원로원 의원 아눌리누스의 집에서 노예로 일한 적이 있었다. 디오클라티아누스라는 이름도 어머니의 고향인 달마티아의 자그마한 마을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곧 면천하여 자유민이 되었고 필경사 직업을 가졌다. 야심 많은 아들은 능력이 뛰어나서 군문에 들어가 재산과 명성을 이루어보겠다는 희망을 품었다. 그는 페르시아 전쟁때 특히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으며, 어떤 과업, 어떤 직책을 맡든지 용기를 발휘했다. 그의 능력은 화려하기 보다 실용적인 것이었다. 아우구스투스와 마찬가지로 그는 새로운 제국의 창건자였으며 전사라기 보다는 정치가였다. 

<동료 황제  막시미아누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로서 내린 첫번째 조치는 절제와 성실성을 만천하에 알리는 것이었다. 그는 마르쿠스 안토니누스의 전례를 따라서, 먼저 동료인 막시미아누스에게 카이사르라는 칭호를 부여했고, 그로부터 1년 뒤에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친구이면서 동료인 막시미아누스를 국가적 위기의 시기에 동료 황제로 맞아들임으로써 서부와 동방의 국방을 강화할 수 있었다.  막시미아누스는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와 마찬가지로 시르미움의 농부 출신이었다. 비록 황제라고는 하지만 글자를 모르고 법률을 무시했다.  전쟁은 그가 아는 유일한 기술이었다.  명령을 내리기 보다 복종을 잘하는 기질을 가진 그는 용기와 끈기와 경험을 바탕으로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잘 해냈다. 영리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자신이 하기 싫은 잔인한 일은 막시미아누스에게 대행시켰다.  성격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황제는 야인시절에 맺었던 우정을 평생 유지했다. 

<제국의 분할 통치>

    신중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온 사방에서 바바리안들의 침입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각 방면마다 대군을 두어야 하고 그것을 통솔할 황제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런 관점에 입각하여 그는 황제의 막강한 권력을 다시 한번 분할하기로 결정했다. 장군 두명을 선발하여 정제(正帝, 아우구스투스) 보다는 한 등급 아래인 부제(副帝, 카이사르)의 칭호를 수여하여 공동황제로서 제국의 행정을 분담시키기로 했다. 이렇게 하여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가 두 명의 부제로 선임되었다. 

    네 명의 황제는 광대한 제국을 나누어 통치했다. 먼저 콘스탄티우스는 갈리아, 스페인, 브리타니아의 통치를 맡았다. 갈레리우스는 도나우 강변에 주둔하면서 일리리쿰 속주들을 단속했다. 막시미아누스는 이탈리아와 아프리카를 담당했다. 마지막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트라키아, 이집트, 소아시아를 통치했다. 각 황제는 자신의 담당지역에서 전결 권한을 행사했다. 그러나 그들의 단합된 권위는 제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각 황제는 필요할 때마다 조언과 방문으로 다른 황제들을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부제들은 한 등급 위인 정제들을 존경했고, 디오클레티아누스를 제외한 나머지 세 황제는 자신을 발탁한 4 황제 제도의 창안자에게 감사와 존경을 바쳤다. 그들은 서로 권력에 대한 질투 같은 것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원로원의 파괴>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로마와 로마의 자유를 싫어한 것은 일시적 변덕의 소치가 아니라 교묘한 정책의 결과였다.  이 황제는 교묘한 제국 행정의 새로운 시스템을 수립했고, 그것은 후일 콘스탄티누스 가문에 의해 완성되었다.

    황제들이 수도 로마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상주 궁궐을 건설하면서 그들은 아우구스투스가 후계자들에게 권장한 위장의 태도를 완전히 내던질 수 있었다. 입법권과 행정권을 행사하는데 황제는 원로원과 의논하는 것이 아니라 궁중의 신하들과 의논했다. 제국의 마지막 시기까지 원로원의 이름은 명예롭게 거론되었다. 명예로운 호칭으로 의원들의 호칭을 충족시켜주었지만, 오랫동안 권력의 원천이요 기구였던 원로원은 이제 겉꾸밈이 필요할 때면 가끔씩 생각나고 그때 이외에는 까맣게 잊힌 존재가 되고 말았다. 궁중과 실제정치로부터 단절된 로마 원로원은 카피톨리노 언덕에 내버려진 오래된 골동품에 불과했다.

<황제라는 칭호>    

  로마 황제들은 원로원과 오래된 수도에서 멀어지면서 법적 권력의 근원과 성격을 쉽게 잊어버렸다. 집정관, 총독, 감찰관, 호민관등으로 이루어진 민간 보직은 백성들에게 공화국 시대를 연상시켰고, 그리하여 이런 호칭은 사라졌다. 하지만 황제들은 여전히 임페라토르라는 칭호로 불렸는데, 이것은 전보다 더 위엄있고 새로운 의미로 사용되었다. 임페라토르는 더 이상 로마 군대의 사령관(장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 세계의 군주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원래 군사적 성격을 가졌으나 좀 더 굴종을 강요하는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다. 도미누스(DOMINUS 또는 LORD)라는 용어는 신하에 대한 군주의 권위 혹은 병사에 대한 사령관의 권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집안의 노예에 대해 가지는 전제적 권한을 의미했다. 이런 함의를 갖고 있기 때문에 초창기 로마 황제들은 혐오감을 느끼며 도미누스라는 칭호를 기피했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그 칭호에 대한 황제들의 저항은 약해졌고 혐오감의 강도도 떨어졌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의 주인이며 황제라는 칭호가 아첨꾼들에 의해 고안되었을 뿐만 아니라 법률과 공공 기념비에 정기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라틴어가 사용되는 곳에서 임페라토르라는 칭호는 왕보다는 더 근사한 이미지를 풍겼다. 바바리안 부족들의 우두머리도 왕이라는 칭호를 쓰기 때문에 로마 황제가 그들과 똑같이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한다는 것은 격에 맞지 않는 우스운 일이기도 했다. 게다가 로마 역사에서도 왕이라는 칭호를 쓴 인물은 로물루스나 타르퀴니우스 정도였다.

    통치자의 신분을 구분해주는것은 자의(보라색 겉옷)라는 사령관용 군복뿐이었다. 그리고 원로원 의원은 넓은 보라색 띠가 사선으로 장식된 옷, 기사 계급은 좁은 보라색 띠가 둘러진 옷을 입었다. 그러나 디오클라티아누스는 자부심 때문에 혹은 정책적으로 페르시아 궁중의 장엄한 의식을 도입했다. 그는 로마인들이 왕의 상징이라고 해서 또 미친 칼리굴라의 소행을 연상시킨다고 해서 싫어했던 왕관을 머리에 썼다. 디오클라티아누스와 그 후계자들은 비단과 황금으로 만든 화려한 옷을 입었고, 보석 박힌 화려한 신발을 신었다. 날마다 새로운 의전 절차가 도입되어 신성한 황제의 곁에 다가 가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또 황제를 알현할 때는 페르시아식으로 바닥에 부복하여 절을 올려야 했다. 디오클라티아누스는 바닥에 엎드리는 부복의 예의는 백성들에게 자연스럽게 경배의 마음을 심어줄 것으로 판단했다.

<   디오클라티아누스 행정의 특징 >

    디오클라티아누스가 도입한 새로운 제도의 첫번째는 번쩍거리는 과시였다.  두번째 원칙은 행정의 분할이었다. 그는 제국, 속주, 민간행정과 군사행정을 분할했다. 그는 세 명의 공동 황제를 두어 최고 권력을 나누어 가졌다. 한 사람의 능력으로는 공공의 방어를 잘해낼 수 없다고 판단했으므로, 그는 4황제 체제를 임시 방편으로 본 것이 아니라 국가정체의 근본적 법률로 인식했다. 

    제국은 4개의 부분으로 나뉘었다. 동방과 이탈리아가 가장 영예로운 자리였고, 라인 강과 도나우 강은 가장 힘든 자리였다. 동방과 이탈리아는 아우구스투스가 맡고, 라인 강과 도나우 강은 카이사르가 맡았다. 로마 군단은 네 명의 황제 손에 있었고, 어떤 야심찬 장군이 모반을 일으키려 한다 해도 네 명의 황제를 연속적으로 거꾸러뜨리기는 어려운 일이므로 국가의 기반은 더욱 안전해 질것이다. 민간 행정에서 네 황제는 단일한 군주의 단합된 힘을 과시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칙령은 네 명의 이름이 연서되었으므로 모든 속주들에서 네 명 공동의 협의와 권위에 의해 반포된 것으로 해석되었다. 이런 사전 예방 조치에도 불구하고 로마 세계의 정치적 단합은 서서히 붕괴되었고, 분할의 원칙이 도입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동로마제국과 서로마제국으로 영구히 분단되는 결과를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