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태풍이 지나갔는데, 오늘 아침은 파란 하늘이 보인다. 1주일간 미뤘던 빨래를 해서 널면 잘 마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세탁기에 빨랫감을 넣고 돌리면서, 기왕이면 빨래를 바람과 햇살이 좋은 9층 옥상에서 말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제는 태풍으로 9층 옥상으로 나가는 문을 잠가뒀지만, 오늘은 열지 않았을까?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전확인차 내려간다. 문이 열려 있다.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 건조대에 널고, 건조대 통째로 가지고 가려고 한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빨래가 마를 동안 읽을 책과 간간이 음악을 듣기 위해 휴대용 보스 스피커를 챙기고 냉장고에서 시원한 물도 꺼낸다. 사탕도 5개 챙겨 배낭에 넣는다. 그리고 휴대용 리클라이너 체어를 먼저 엘리베이터 문 옆에 가져다 놓고, 빨래가 널린 건조대를 가지고 나온다.
9층에 내려 건조대를 바람이 잘 지나는 길목에 놓는다. 그런데 바람이 세서 건조대가 자꾸 넘어진다. 옥상 빨래줄에 있던 빨래집게를 가져다 빨래가 날아가지 않도록 고정하고 건조대는 난간에 붙여서 세워 놓으니 넘어지진 않는다. 오케이. 바람이 좋아 빨래가 펄럭일 정도니 잘 마르겠다. 건조대 옆에 리클라이너 의자를 편다. 그리고 앉아서 앞을 보니 거제도와 세간도 통영 앞바다가 앞마당처럼 잘 보인다. 이런 경치를 몰랐구나. 이렇게 좋은 명당자리가 가깝게 있었는데 모르고 있었다니.... 의자에 앉아 휴대용 보스 스피커를 통해 음악을 들으며, 책을 펴니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주고 바다를 지나는 배들의 엔진소리가 마치 남태평양 어느 섬, 야자수 아래 그늘에서 책을 읽는 듯한 착각을 준다. 그래... 유럽사람들이나 미국인들은 휴양지에 가면 해변가 그늘에 누워 책을 읽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그들이 즐기는 樂, 기쁨이란 이런 것이었구나!
책 한페이지를 넘기고 눈을 들어 앞을 보니 시원한 바다가 펼쳐져 있다. 책을 보느라 근거리에 조여져 있던 눈의 피로를 풀고 서쪽을 보니 파랗던 하늘이 사라지고 회색빛으로 바뀌어있다. 멀리 고성부근에는 산주변에 하얀 수증기가 하늘에서 산으로 내려오는 것이 보인다. 비다. 1시간여 지나니 바람이 세지고 축축한 기운이 느껴진다. 통영 미늘고개 쪽도 하얗다. 철수. 빨래 건조대를 얼른 들어 엘리베이터 옆으로 가져다 놓고 리클라이너 의자를 챙기는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아침의 파란하늘에 속아 뽀송한 빨래 건조의 유혹에 넘어갔지만 수확은 있다. 9층 옥상에서 리클라이너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음악 듣고, 커피도 마시고... 이래서 고층건물 펜트하우스에 사는구나 싶다. 나는 수십억 한다는 뉴욕의 고층 펜트하우스보다 더 멋진 통영 한려해상공원을 내려다보며 나 홀로 즐기는 명당자리를 발견? 아니 확보했다. 좋은 것은 한꺼번에 가져다 주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르는 법이다. 하나씩 찾아가며 느끼는 기쁨과 과정의 즐거움은 온몸이 찌릿하게 떨릴 정도로 환희를 가져다 준다. 나는 여기가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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