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세이돈이 세 아들 넵튠과 함께 화 내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태풍이 휘몰아치는 바다가 보고 싶었다. 내 안에 잠재된 파괴 본능이 눈을 뜬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편안한 서울에서 살며 바다의 무서움을 모르는 철부지 같은 낭만을 꿈꾸는 것이라 해도 좋다. 그냥 파도가 휘몰아 치고 폭풍이 쏟아지는 바다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더 이상 다른 의미는 없다. 마침 2020년 들어서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상륙하는 태풍 '장미'가 또 우연하게도 내가 1년살기를 하고 있는 통영으로 상륙한다니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있을까? 아침 6시부터 뉴스를 통해 태풍의 진로를 살핀다. 9시 뉴스, 12시 뉴스를 통해 제주도 동쪽을 지나는 태풍이 남해안 통영으로 상륙해 부산을 거쳐 울산으로 빠져 나간다고 한다. 오후 3시경 통영으로 상륙한다며 해안가로 부터 멀어지라는 중앙재난본부의 메시지가 시간마다 울린다. 하지만 커지는 호기심이 내 귀에 대고 속삭인다. 차를 가지고 나가 볼까? 그러기에는 젊은 치기를 한참 지난 60을 넘어선 나이. 결국 중앙재난본부의 지침을 따르기로 한다.
하지만 성난 바다를 볼 수 있는 기회를 버릴 수는 없어, 2시 30분부터 거제대교를 바라보는 안전한 1층 주차장으로 내려 간다. 아파트 바로 앞 나무의 가지들이 흔들리는 모습으로 바람을 측정할 수 있고, 견내량 신촌마을 포구바다를 살피며 파도의 세기를 살핀다. 그런데 거제도 앞산은 검은 구름으로 싸여 있지만, 견내량 바다는 너무 조용하고 잔잔하다. 나무 꼭대기의 나뭇잎들도 비바람이 불면서 흔들리는 정도. 태풍이 오는 것이 맞나? 시간이 흘러간다. 2시 40분, 50분. 이상한 사람처럼 홀로 주차장에서 서성이며 태풍을 기다리는 모습이라니... 3시가 넘어도 태풍의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속도가 느려졌나? 아내에게 화상통화를 한다. 바다 모습을 보여주며 여기는 이렇게 조용하니 태풍 걱정은 하지 말라고 말해준다. 3시 20분까지 기다리다, 결국은 13층으로 올라간다. YTN 뉴스 검색을 하니 태풍은 2시 50분에 거제도 남쪽 해안으로 상륙했고, 부산을 향하고 있다고 나온다.
아니, 태풍이 이런거였어? 너무 얌전한 태풍이다. 포세이돈이 오다 지쳤는가 보다. 여기 통영은 참 살기 좋은 곳이다. 그리고 견내량은 더욱 살기 좋은 곳이다. 태평양의 거센 파도가 와도 통영 앞에 버티고 선 거제도를 거치며 얌전해 진다. 태풍이 불어와도 견내량은 남쪽으로는 거제도가 막아주고, 서쪽은 한산도와 해간도가 막고, 동쪽은 칠천도와 지도가 막아주니 이런 지형은 찾기 힘들다. 물론 북쪽은 고성으로 가는 내륙이어서 바다의 영향권에서 벗어난다. 산세라면 좌청룡 우백호, 포란지세. 외부의 변화에 쉽게 대응하기 어려운 노년에 접어들면 이런 곳에서 살아야 한다. 워낙 약한 태풍이 와서 그런 것이었는지, 아니면 통영이 자리한 천혜적 지형 덕택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올해 처음 우리나라에 상륙한 태풍 장미는 아주 얌전하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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