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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 프란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 1896년 미네소타주 세인트 폴에서 가구업자인 아버지와 아일랜드계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 1913년 프린스턴 입학, 부유한 집 딸인 지니브러 킹을 만났으나 가난하다는 이유로 거절당함. 1925년 29세때 '위대한 개츠비'를 출간, 문단의 총아로 떠오름. 1920년대가 끝나가면서 삶도 추락하기 시작, 1940년 심장마비로 사망.

- 제1장 -   어리고 세상 물정 모르던 시절 아버지께서 나에게 충고를 한마디 해 주셨다. 그때 이후 나는 그 충고의 의미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보았다. "누구를 비판하고 싶으면 언제나 세상사람들이 다 너만큼 혜택을 받고 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라."   아버지는 더 이상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많은 말이 없이도  아버지와 나는 서로 뜻이 잘 통했고, 나는 아버지의 말씀에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많은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결과 나에게는 모든 판단을 유보하는 경향이 생겼는데,  그 습관 때문에 별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적잖이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지만 내가 아주 탁월하게 지루한 사람들의 제물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정상적인 사람에게서 이런 특징이 나타나면 비정상적인 사람은 재빨리 그 특성을 눈치채고 들러붙는다. 그래서 대학시절 나는 엉뚱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친구들의 남모르는 슬픔을 알고 있다고해서 부당하게 정치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던 것이다.  

- 나는 더 이상 특권이라도 지닌 것처럼 인간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보며 소란스럽게 유람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런 내 반응은 이 책의 제목으로 이름을 빌린 개츠비에게만 예외였다. 개츠비는 내가 마음으로부터 경멸하는 모든 것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개성이라고 하는 것이 일련의 성공적인 몸짓이라면 그에게는 어떤 화려한 면, 만 육천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도 지진을 기록하는 정교한 기계들과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인생에서 이룰 수 있는 것을 느끼는 고양된 감수성 같은 것이 있었다.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능력은 '창조적 기질'이라는 명칭으로 그럴듯하게 포장된, 맥없이 쉽게 감동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것은 희망을 향한 비상한 재능이었으며, 지금까지 내가 다른 누구에서도 볼 수 없었고 앞으로도 볼 수 없을 낭만적 감응력이었다. 결국 개츠비가 옳았다. 이루지 못한 일에 대한 인간의 슬픔과 숨 가쁘게 들뜬 감정에  내가 일시적으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까닭은 개츠비를 삼켜버린 것,  그의 꿈이 사라진 자리에 떠돌고 있던  더러운 흙먼지 때문이었다.  

- 중서부지방은 이제 세계의 따듯한 중심이 아니라 거친 우주의 변방처럼 보였다. 그래서 나는 동부로 가서 채권 사업을 배우기로 작정했다. 내가 아는 사람은 전부 채권사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러니 한 사람정도 더 이 사업에 뛰어들어도 별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 누구나 자신에게 적어도 하나의 미덕이 있다고 생각하기 마련인데, 나의 미덕은 내가 몇 안되는 정직한 사람들 중 하나라는 것이다.

-  개츠비의 본명은, 적어도 법적으로는 제임스 개츠였다. 그는 열 일곱 되던 해, 그의 경력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 바로 그 순간,  즉 댄 코디가 슈피리어 호수의 가장 위험한 여울에 닻을 내리는 것을 보았을 때 자신의 이름을 바꿨다. 그날 오후 찢어진 초록색 저지 셔츠와 캔버스 천으로 된 바지를 입고  해변을 어슬렁 거리고 있을 때의 그는 제임스 개츠였다. 그러나 보트를 빌려 투올로미호로 노를 저어가 댄 코디에게 바람이 몰아쳐 반시간 정도 지나면 배가 두동강이 날지도 모른다고 알려주었을 때의 그는 이미 제임스 개츠비였다.  

- 그때 이미 개츠비는 그 이름을 오랫동안 준비해 놓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부모는 별 성공을 이루지 못한 주변 없는 농사꾼이었으며, 그의 상상력은 결코 그들을 진정한 부모로 인정한 적이 없었다. 진실을 말하자면 롱아일랜드, 웨스에그에 사는 제이 개츠비는 자신에 대한 플라톤적 관념에서 솟아난 존재라는 것이다. 그는 다시 떠돌다 슈피리어호수로 돌아왔고, 마침 댄 코디가 호숫가 얕은 곳에 요트의 닻을 내렸던 그날에도 무언가 할 일을 찾는 중이었다.   

- 코디는 그때 오십세였다. 그는 네바다주의 은광과 캐나다 유콘지역의 금광, 그리고 1875년 이래 모든 광물 러시를 통해 성공한 인물이었다. 몬태나주에서 구리를 거래해 백만장자가 된 이후에는 육체적으로 여전히 원기왕성했지만 마음은 좀 여려진 듯했다.   

- 노에 기대 난간을 친 갑판을 올려다보던 젊은 개츠비에게 그 요트는 세계의 모든 아름다움과 화려함을 대표했다. 그는 아마 코디를 향해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그는 이미 미소를 지으면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중략 ~ 개츠비는 뚜렷하지 않은 개인적인 역할로 고용되었다. ~ 중략 ~ 어느날 밤, 보스톤에서 엘라 케이가 배에 탄지 일주일 후 댄 코디가 별 축복도 받지 못하고 죽지만 않았더라면 그 여행은 무한정 계속되었을 것이다.  

- 개츠비가 돈을 물려 받은 것은 코디에게서였다. 그는 코디에게서 이만 오천달러의 유산을 상속받았다.

-   개츠비가 데이지에게서 바랐던 것은 톰에게 가 "당신을 사랑한 적이 없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말로 데이지가 지난 사년을 지워버리고 나면 그들은 좀더 실질적으로 앞으로 할 일을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자유롭게 되고 나면 루이빌로 돌아가 마치 오년 전처럼 그녀의 집에서 결혼하는 것이 그중 하나였다.  

- 서른,  그것은 이후 십년은 외로울 것이고, 알고 지내는 독신자들의 수가 줄어들 것이며, 열정이 담긴 가방은 얄팍해지고, 머리카락도 빠질 것이라는 약속이었다.  

-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결국 서부의 이야기였다. 톰과 개츠비, 데이지와 조던과 나는 모두 서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아마 우리에게는 동부의 삶에 미묘하게 적응하지 못하는 어떤 공통적인 결함이 있었던 것 같다.    

- 동부에 내가 가장 열광했을 때조차, 아이들과 노인들을 제외하고는 끝없이 질문을 해대는 오하이오주 너머로 불규칙하게 퍼져 나가던 따분한 도시들에 비해 동부가 더 우월하다는 것을 가장 날카롭게 의식했을 때조차, 동부에는 언제나 왠지 모를 왜곡된 면이 있는 것 같았다.  

- 나는 그를 용서할 수도, 좋아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가 한 일이 전적으로 정당화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든 일이 아주 무심하고 뒤죽박죽으로 처리된 셈이었다. 톰과 데이지는 무심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물건이든 짐승이든 박살을 내고는 자신들의 돈이나 엄청난 무관심 또는 무엇이든 자신들을 함께 묶어 주는 것 속에 틀어박혀서는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난장판을 남들이 치우게 했다…..

* 마무리 -   거기 앉아 그 옛날의 미지의 세계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나는 또한 개츠비가 데이지의 집 선창 끝에서 반짝이는 초록색 불빛을 보았을 때 느꼈을 경이로움을 생각했다.  그는 이 푸른 잔디밭까지 먼 길을 왔다. 그의 꿈은 손에 잡힐 듯 너무나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꿈이 이미 그의 뒤에서 공화국의 검은 대지가 어둠 아래 굽이치는 도시 너머 저 광대한 어둠 속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몰랐다.   개츠비는 초록색 불빛을, 매년 우리 앞에서 멀어져 가는 축제의 미래를 믿었다. 그 미래는 결국 우리를 피해 갔지만,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내일 우리는 더 빨리 달릴 것이고 더 멀리 우리의 두 팔을 뻗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화창한 날 아침에….   그렇게 우리는 나아간다. 물살을 거스르는 배처럼, 쉼 없이 과거로 떠밀리면서.

* 서평 -   미국의 꿈(American Dream)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 단순하게 말하면, 신세계에 모든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세상을 건설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종교적 박해를 피해 신세계로 이주한 청교도들의 꿈은 기본적으로 믿음의 자유가 보장되는 종교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었고, 식민지 모국의 착취에 반기를 들고 미국 독립을 쟁취했던 사람들의 꿈은 미국의 독립 선언에서 드러나듯, 모든사람에게 자유와 평등과 행복의 추구가 보장되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한편 미국의 방대한 자원과 국토는 누구나 절약과 근면을 통해 성공 할 수 있다는 성공신화가 널리 퍼질 수 있는 토대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19세기 말, 미국이 급속도로 산업화되면서 미국의 꿈은 무엇보다도 물질적인 성취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피츠 제럴드 자신이 재즈시대(Jazz Age)라고 명명한 1920년대는 처음으로 저축보다 소비가 장려되었고, 주식투자로 많은 사람들이 큰 이익을 보았던 유례없는 번영의 시기였지만, 그 번영의 이면에는 정신적 가치의 쇠락과 도덕적 타락이 자리 잡게 되었다.                                                                                                                                                       위대한 개츠비'가 시대의 실상을 포착하여 신세계의 미래에 대한 꿈으로서의 미국의 꿈의 실패를 총체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위대한 개츠비'가 보여주는 세계는 '제의 계곡'과 '에클버그 박사의 거대한 두 눈'이 상징하는 것처럼 문명의 쓰레기가 흘러 넘치고 상업주의가 신을 대체한 정신적 황무지다. 매일 밤 벌어지는 개츠비의 파티는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지만, 서로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단지 즉흥적인 쾌락을 위해 불나방처럼 모여들 뿐 참된 인간관계를 결여하고 있다. 개츠비가 죽었을 때, 그를 찾은 사람이 단 한사람 뿐이었다는 사실은 그런 정신적 빈곤을 통렬하게 풍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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