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입 - 알려지지 않은 사실 / 두 세계 사이에서
긴 머리, 신앙심, 잔학함으로 유명한 아라비아의 왕 유수프 아사르 야타르(일명 두 누와스)가 악취 진동하는 전장을 뒤로 한 채 피로 얼룩진 백마를 타고 홍해의 해안가로 내달렸다. 적군에 패해 도망치는 그의 등 뒤로는 승리한 기독교군이 재물을 강탈하고 왕비를 사로잡기 위해 왕궁 쪽으로 진격하고 있을 터였다. 정복자가 그에게 자비를 베풀 이유는 없었다. 유수프는 기독교도들에게 그 정도로 악명이 자자했다. 2년전 아라비아 남서지역을 그가 믿는 신앙의 근거지로 삼기 위해, 그 지역의 기독교 중심지 나스람을 점령한 뒤에 벌인 학살이 요인이었다. 유수프가 10년이 채 못되는 기간을 단속적으로 지배한 홍해 연안의 힘야르 왕국-- 그 왕국의 경계를 한참 벗어난 지역의 기독교도들에게 그가 자행한 일은 가히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이들의 희생은 물론 기독교 교회에 의해 순교로 가려졌다. 하지만 유수프의 만행까지 용서되지는 않았다. 기독교 왕국 에티오피아(악숨)의 대군이 홍해를 건너와, 힘야르군을 궁지에 몰아 넣은 뒤 교전끝에 패주를 시킨 것이다. 유수프가 천천히 말을 앞으로 몰아갔다. 그렇게 물살을 헤치며 나아가다가 육중한 갑옷 무게에 눌려 그는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아라비아를 지배한 최후의 유대인 왕 유수프 아사르 야타르는 이렇게 생을 마감했다.
* 로마인들은 그들의 제국이 태초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며, 로마제국의 모든 위대성은 무에서 비롯해 발전해 온 것임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제국이 진화해 온 과정을 더듬어가노라면 성공의 비결도 나타났다. 로마에서는 역사가 군대나 황금 못지 않게 국가를 지탱하는 힘줄이었기 때문이다. 로마는 인간 질서의 본보기가 되고자 한 제국 본래의 취지가 훼손되지 않았다는 확신을 역사를 통해 얻었다. 따라서 황제의 위광도 고대 로마의 위대성을 지속적으로 홍보해야만 유지될 수 있었다.
* 위대한 두 제국 페르시아와 로마도 종국에는 니네베(고대 아시리아의 수도)와 티레(고대 페니키아의 도시)의 전철을 밟아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서로마 속주들에 세워진 국가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그 점에서 유럽의 역사가들이 전통적으로 미래의 프랑스에 프랑크족이 출현하고, 미래의 잉글랜드에 앵글족이 출현한 현상을, 로마 황제나 페르시아 왕보다 장기적으로는 한층 더 중요한 사건으로 간주한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당대인들은 몰랐겠지만 파괴는 두 제국을 계속 쫓아다녔다. (중략) 그러나 알고 보면 그 시대 사람들이 세운 제국들은 속세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았다. 비록 백성들에게 존엄한 존재였고 황궁과 성채도 범상치 않게 우뚝 솟아 있었으며 막강한 군대와 관료 집단을 거느리고 세금 징수원들을 수족처럼 부리기는 했지만, 황제는 여전히 하늘의 왕이 지배하는 우주의 한 인간일 따름이었다. 보편적 지배자는 하나뿐이었으니, 바로 신이었다. 이 가설이 유수프가 곤경에 처한 6세기 초에도 여전히 근동지역에서 거부감 없이 통용되어 , 그 지역 지정학의 거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끼쳤다. 같은 맥락에서 유수프군대와 에티오피아 군대 사이의 충돌에도 다투기 좋아하는 군 지도자들의 야망을 상회하는 문제가 걸려 있었다. 하늘의 이해관계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는 얘기다. 유대교의 대의를 위해 싸우는 측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싸우는 측 간의 차이는 화해가 불가능할 정도로 컸다. 두 왕국 모두 자신들이 숭배하는 신이 유일신(그리스어로는 모노스 테오스 monos theos)이라 믿었고, 그것이 양측의 대립을 격화시켰다. 신을 특별하게 해석하는 이런 열정이 남부 아라비아는 물론 문명 세계 전역에서 수백만 사람들의 삶을 결정짓는 정서가 되었다. 정체성을 결정하는 요소도 지상의 왕국들이 아닌, 유일신을 나타내는 다양한 개념들, 곧 '일신교들'이었다.
* 이는 미래에 엄청난 중요성을 지니게 될 인간사회의 변화를 예고하는 전조였다. 여러 이름을 가진 일신교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국교로 채택된 것이 전 세계에 미친 파급력에 비하면, 고대에서 비롯된 현대세계의 모든 다양한 특징들, 곧 알파벳, 민주주의, 검투사 영화들조차 미미하기 그지 없었다. (중략) 지역이 어디든 남녀들은 유일신이 특정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믿음에 고취되는 순간, 그것의 영원한 힘을 드러내 보이려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져온 혁명은 지금까지도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같은 혁명의 기운과 발전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내가 이 책에서 하려고 하는 일이다.
* 고대 후기를 다루는 이야기가 애초에 생각했던 것보다 생소하고 놀라운 까닭도 거기에 있다. 실제로 그 당시에는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고 그것을 숨기는 능력이 매우 뛰어났기 때문에, 경악스러운 효과를 내고 못 내고는 순전히 글 쓰는 사람의 마음먹기에 달린 문제였다. 물론 현재를 위해 과거를 고쳐 쓰는 일은 어느 시대에나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피나는 노력을 기울이거나 혹은 영속적인 효과를 거둘만큼 노력을 기울인 면에서 고대 후기의 역사가들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렇게 보면 유대교와 기독교의 역사를 정교하게 다듬어 정통적이고 논리적으로 합당하게 만든 다음에 그것과 모순되는 내용은 가차없이 제거한 것이야말로, 그 시대의 유대교와 기독교도 학자들이 거둔 최고의 성과라고 할 만하다.
* 같은 맥락에서 오늘날의 기독교도들 또한, 예수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와 관계없이 교회에서 배운 대로 그의 포교와 신성을 이해하고, 후기 로마 정치를 뒤흔든 격변, 다시말해 하느님의 모든 백성을 하나로 결합할 수 있는 신조를 만들어내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 주교와 황제들의 증언자가 되고 있다. 이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두 종교의 궁극적 기원이 어디에 있든 간에, 유대교와 기독교의 기본 골격이 형성된 것은 고대 후기 였다는 것이다.
* 고대 후기의 유대교와 기독교 학자들은 순전한 노동력만으로 영속적인 혁신의 과업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 그 점에서 그들이 숭배한 다양한 일신교뿐 아니라 종교 자체에 대한 해석을 갈고 다듬어, 오늘날 전 세계 수십억명의 사람들이 신은 이승에서의 행위뿐 아니라 인간 영혼의 영원한 운명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믿게 만든 것이야말로 그들이 거둔 궁극적 성과라 할 만하다. 고대 후기의 기록물들을 면밀히 검토하여 실제로 일어났을 만한 일들에 대한 증거를 찾는 작업이, 민감하면서도 매혹적인 까닭이 거기에 있다.
** 가장 위대한 이야기 **
* 아랍인들은 자신들이 거둔 그 모든 놀라운 승리가 신의 가호 덕이라 믿었고, 그 사실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유대인과 기독교도에게 내린 계시를 능가했을 뿐만 아니라, 계시에 복종하다 세계 제국으로 가는 길까지 열어주었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가 탄생한 지 800년 뒤에는 대다수 아랍인들이 스스로를 '신에게 복종한 사람들'을 뜻하는 무슬림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대서양 연안에서 중국의 주변부까지 뻗어나간, 그들 조상의 검이 쟁취한 거대한 땅 덩어리가 신이 요구한 아랍인 복종의 궁극적 금자탑 역할을 했고, 그 결과 9세기 초에는 복종을 뜻하는 말인 '이슬람'이 하나의 온전한 문명을 이루게 되었다.
* 아랍인들이 지난 시대를 연구해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린 것도그렇게 보면 놀랄 일이 아니다. 이라크 출신으로 9세기 초 이집트에 정착해 살았던 학자 이븐 히샴도 신의 목적을 헤아리기 위해 '예언자의 전기;를 썼다. 그는 그것을 본보기가 되는 행동을 뜻하는 시라sira로 이름 붙였다. 전기의 주체가 한 일보다는 그가 행한 방식이 주된 관심사였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 이븐 히샴에 따르면 당시에 메카는 마녀가 득시글거리고 귀신이 출몰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도시 중앙에는 아라비아 반도 전역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경의를 표하는 무시무시한 신과 사악한 힘을 가진 토템들이 깃든, 돌과 진흙으로 지어진 정육면체 모양의 카바 신전도 있었다. 일반 가정집들도 집 안에 우상을 모셔놓고 먼 길을 떠나기 전에 그것을 어루만지며 행운을 비는 풍습이 있었다. 심지어 둥근 돌에도 제물을 바칠 만큼 메카 사람들의 우상 숭배는 뿌리 깊었다.
* 세월이 어느정도 흐른 뒤에는 그 일이 시간의 질서까지 바꿔놓은 대사건으로 인식되어, 무슬림들은 헤지라가 일어난 해를 이슬람력의 원년으로 삼았다. 연대도 '헤지라 기원으로'의 뜻을 가진 라틴어 'Anno Hegirae'의 머리글자인 'AH'로 표시했다. 이븐 히샴도 무함마드가 처음 계시를 받은 사건보다 메카에서 메디나로 도주한 사건을 그의 생애의 요체가 되는 것으로 파악했다. 헤지라를, 예언자가 단순한 설교자의 위치를 벗어나 눈부신 위업을 이루고 그리하여 이윽고 새로운 정치 질서의 지도자로 부상하게 되는 사건으로 본 것이다.
* 무함마드는 오아시스 도시에 평화를 가져다 주었으니 조정자로 왔던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훨씬 상회하는 그 무엇을 야스리브 사람들에게 제공해 준 것이다. 흩어져 부유하는 부족적 질서의 티끌들을 그러모아서 단일 공동체(민족)으로서의 새로운 정체성, 다시 말해 초민족적 움마 Ummah 구성원으로서의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해 준 것이다.
* 무함마드가 죽기 2년전에 메카를 정복한 것이다. 말을 타고 고향도시에 들어간 그는 카바 신전에 있던 우상들을 죄다 밖으로 꺼내놓고 거대한 화톳불을 피워 그것들을 화형시켰다. 악마가 주변으로 자손들을 불러 비통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다신교의 빛나는 보루인 장엄한 신전이 이슬람에 굴복했으니 악마로서는 비통해 할만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메카를 유일신에게 봉헌하는 의식은 혁신과 거리가 멀었다. 신전을 본래의 상태로 환원시키라는 것이 무함마드가 부하들에게 내린 계시였으니 말이다. "메카는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한 날에 신성한 곳이 되었으니, 부활의 날(심판의 날)까지도 가장 신성한 곳으로 남게 될 것이다." 이 확신이 신자들에게는 큰 위안이 되었다. 2년뒤 무함마드 사후에 찾아온 암담한 시절에도 그러한 믿음으로 버틸 수 있었다. 그 안에는 하느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았다는 암시가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라비아가 예언자를 잃고도, 신성함에 의해 거룩해진 곳으로 계속 남을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이다. 그렇다고 메카만 '최고의 신성함'을 유지했던 것은 아니고, 움마도 예언자의 가르침에 더 큰 영광을 부여해 주며 최고의 신성함을 유지했다. 이어진 몇 년, 몇십년, 몇백 년을 거치는 동안 무슬림들이 전 세계를 카바로 만들기 위해 정복하고, 정화하고, 신성화하는 작업에 매진한 것도 그것을 말해준다.
* 무함마드의 생애가 주는 교훈만으로 책 전체를 꾸밀 필요는 없었다. 하나의 일화, 하나의 말씀만으로도 책을 꾸미기에는 충분했다. 실제로 이븐 히샴의 시대로부터 불과 1세기가 지났을 뿐인데 그 같은 전기적 일화와 어록의 조각들은 수만, 수십만개로 불어나 하디스 Hadith라는 책으로 편찬되기에 이르렀다. 하디스는 방대한 전승이 수록되었는데도 주제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어 원하는 부분을 목록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또한 모든 주제에 무함마드의 견해가 반영되어 있어, 가령 악마와 결혼해도 좋은지, 지옥의 망령들은 왜 거지반 여자인지, 생식할 때 느끼는 오르가슴이 태어날 아기의 외모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등등 일반인이 가질 법한 모든 궁금증에 대한 해답도 얻을 수 있었다. 단순히 전기의 조각들을 모아 놓는데 그치지 않고, 후대인들을 계도할 목적과 삶을 바라보는 예언자의 전반적 태도를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편찬된 기록물이었던 탓이다. 따라서 무슬림들에게는 이보다 더 소중한 책도 없었다. 하디스가 인용문을 엮어놓은 명문집 수준을 넘어 무한대로 중요한 책, 규제되지 않은 것이 없고 (나쁜일이 일어날) 여지도 두지 않는, 인간 실존의 모든 양상을 아우른 훌륭한 법이 된 것이다. 학자들은 그것을 순나 sunna라 불렀다. 그런만큼 이 또한 무슬림 민족들이 누리는 또 다른 광영이 될 만했다. 세속적 관습이나 인간 발명의 웅덩이에서 퍼 올린 법이 아닌, 하늘이 직접 내려준 법으로 자랑할 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 순나에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의무사항, 기도하는 법, 순례를 가야 할 장소, 먹어도 되는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 단식을 행해야 하는 시기가 꼼꼼하게 적혀 있었다. 무슬림들이 그나마 지난날의 야만적 사회의 본능을 억누르고 문명화된 인간 공동체가 되는 기쁨을 느낄 수 있었던 것도 이 순나 덕분이었다. 이를 지키며 산 사람들이 순나를 기적의 완성으로 간주하여, 그것의 기원이 하늘에 있음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던 것도 그래서이다. 한 저명한 하디스 대가의 현란한 논리에 따르면 "그것을 예언자에게 전해준 이는 가브리엘이고, 가브리엘은 하느님이 보내준 천사"였다.
* 신이 무함마드에게 내린 말씀, "(하느님이) 성서를 그대에게 계시하사 이로 하여 모든 것을 설명하라."가 그것이다. 여기 나오는 성서 Book 는 물론 무함마드의 살아생전 하느님이 내린 계시의 총합을 말하는 것으로 , 그의 추종자들이 기록해 둔 것을 예언자가 죽은 뒤 암송문 recitation 곧 꾸란(코란)으로 엮은 것을 말한다.
* 무함마드가 수년동안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다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과 그것(창조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 양립하는 것이었고, 그것을 위해 양자를 조화롭게 하려면 수많은 논의와 세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흡족할 만한 수준으로 정리되기까지 수백 년이 걸린 것도 그래서였다. 일평생 경건하고 지혜롭고 학식 깊은 인물로 인정받은 무슬림만이 심해에 발을 담그는 것과 같은 난해한 작업을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던만큼 꾸란을 해석하는 학문, 다시말해 '타프시르 tafsor(주석서)'는 가장 명예로운 일로 평가받았으나, 그 못지 않게 위험도 많이 따르는 일이었다. 꾸란에 '하느님의 길을 방해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이 그들이 저지른 해악으로 말미암아) 벌을 더하여 주리라'는 경고의 말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주석 하나하나를 달 때마다 그들은 침이 마르는 긴장을 느꼈다. 자칫 실수라도 했다가는 치명적 결과로 이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수백년의 세월이 흐르자 그 어려움도 마침내 극복되었다. 그것도 아주 영광스럽게. 꾸란이라는 빛나는 기둥에 화려한 수사로 가득 찬 주석의 얼개를 씌우게 된 것이다.
** 공허한 무 **
* 무슬림학자들이 순나를 완성하는 데 오랜 기간이 걸린 것은 당연하다. 그 정도로 그것은 지난한 노력을 요했다. 예언자의 것으로 간주된 어록의 양은 실로 미미하기 짝이 없어 무함마드가 죽은 지 400년이 지난 11세기에 들어서야 법학자들은 순나의 자루를 채울 수 있었다. 신랄하고 때로는 살인적인 600년의 기나긴 논쟁을 거친 뒤에야 순나는 신을 단순히 반영한 것에 그친 것이 아닌, 만들어지지 않고 영원하며 신성한 특징을 지닌 꾸란의 본질에 부합하는 형태로 만들어졌다. 그 일을 성급하게 진행하기에는 너무도 중대하고, 너무도 미묘하며, 너무도 곤란한 문제들이 게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 같은 문제에 직면(훗날 이슬람 문명이 철학자들의 오랜 사유로 변모된 것)했을 망정 무슬림과 기독교도들이 해결한 방식은 확연히 달랐다. 이슬람의 경우 꾸란이 하느님의 말씀과 동일시 되었으므로 그 말씀(꾸란)을 합리적으로 분석하는 것 자체가 허용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이미 불경이었다. 이슬람에서 '예언자의 계시들'과 가장 유사한 의미를 갖는 것이, 기독교에서는 성서가 아닌 '신의 아들', 곧 예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생애를 기록한 책이 아무리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있다 해도, 그리스도 본인이 아니므로 그것은 신성하게 간주되지 않았다. 물론 기독교도들은 그 기록을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이 오류에 빠지기 쉬운 인간의 조정에 따른 결과물이라는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었다.
* 19세기부터 기독교 신앙의 거의 모든 교의가 처참하게 난도질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략) 찰스 다윈도 신기원을 이룬 작품 <종의 기원>을 발표한 것이다. 성서의 창조 관련 이야기에도 틀림없는 진실이 내포되어 있을 수 있다는 관점에 파괴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책이었다. 기독교적 서구에서 수천 년동안 신성불가침의 하느님 말씀으로 간주되어 오던 것을 과학적 연구 대상으로 삼게 된 이상, 그것을 되돌리기는 불가능했다. 시대가 그것을 말해 주었다. 모세 오경 혹은 토라로 불리는 구약성서의 다섯 편만 해도 전통적으로 모세가 집필했다고 알려진 것과 달리, 다수의 전승을 짜깁기했다는 것이 19세기 독일 대학 신학부의 학자들 주장이었다.
** 바빌론 강가에서 **
* 실제로 페르시아 백성들 중에는 그곳 원예 전통의 역사를 태초에서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 꽃내음도 향기로운 왕궁 정원을 둘러싼 담장 너머, 티그리스 강변으로 수 킬로미터 뻗어나간 거대한 정주지에, 천지창조 직후 크테시폰의 모든 지역은 물론 그곳을 넘어서는 곳까지 낙원이었다고 믿은 사람들이 살았다는 것이다. 그들의 경전에 "그리고 주 하느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세우셨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그것을 말해주는 증거였다. 그에 앞서 하느님이, 티그리스 강에서 피어 오르는 것과 같은 안개가 땅에서 올라오자 진흙으로 벽돌도 아니고 도시도 아닌 사람을 지으셨으니, 그가 바로 첫 남자, 그 말을 전해준 사람들의 언어로는 '땅'을 뜻하는 '아담'이었다.
*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메소포타미아의 원시적 전통들에 그 모든 경멸과 두려움 섞인 질시를 보내면서도 유대인들은 정작 그것들에 끝없이 매혹되었다. 최초의 남녀에게 지상낙원이 되어준 메소포타미아가 인류에게도, 그렇지 않았으면 사라졌을 세계의 값진 유산, 곧 학문의 원천이 되었던 탓이다. 티그리스 강이 베흐-아르다시르의 웅대함을 진흙 벌로 만들어버렸듯, 대홍수는 온 세상을 물에 잠기게 하여 (아담과 이브가 살았던) 에덴동산의 흔적마저 사라지게 했다. 노아가 재앙이 닥치리라는 사전 경고를 받고 큰 배를 만들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생명마저 소멸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홍수 이전 세계의 모든 흔적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노아의 후손들이 메소포타미아의 진흙 구덩이를 파다가, 그곳에서 묻힌 서적들을 발견한 것이다. 해독해 보니 그것들은 대홍수 이전에 살았던 점쟁이들, 다시말해 첫 세대 인간들의 지혜가 담긴 책이었다. 메소포타미아 이후 유대인들 뿐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점술이 처음 등장한 곳'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된 발견이었다.
* 메소포타미아의 유대인들은, 첫 추방이 있은 뒤 1000년 넘게 그곳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기고 살았다. 따라서 고국에 대한 향수를 결코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신이 부여해준 고향 도시 예루살렘은 언제나 지상에서 가장 신성한 곳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궁극적 기원은 성지가 아닌 유프라테스 강변에 있다는 것이 그들의 오랜 확신이었다.
* 하느님이 내려주신 조국이 있었으므로, 그렇다고 그들이 실제로 약속의 땅에 가서 살고 싶어한 것은 아니었다. 유대인 현자들이 말했듯, 유대인들 중에는 대맥 꿈을 꾸는 즉시 그곳으로 이주하려는 사람도 물론 있었겠지만, 대다수 유대인들은 여전히 이주가 실현되기보다는 생각으로 머물러 있기를 바랐다. 실제로 수 세기가 지난 뒤에 땅도 비옥하고 코스모폴리탄적이며 부유한 메소포타미아에 살기를 원했던 바람이, 유대인들이 타향살이에 종지부를 찍지 못하는 유일한 이유였다.
* 메소포타미아에는 페르시아 왕의 제안(예루살렘 귀환과 부서진 성전 재건 허용)을 고맙게 받아들인 유대인 못지 않게 그렇지 않은 유대인들도 많았다. 결국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메소포타미아의 기름진 땅에 대대손손 뿌리를 내렸다. 그러므로 3세기 초 아르다시르 1세가 크테시폰에 입성했을 때 유대인의 핵심지가 된 곳도 당연히 예루살렘과 그 주변 지역이 아닌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변이었다.
*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메소포타미아 유대인들의 믿음은, 그곳이 대홍수 이전에 활약한 거인들로까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의 지혜로 이름난 곳이라는 자부심과 단단히 결합되어 있었다. 아브라함의 태생지에 살았던 유대인 현자들도 그것을 근거로 그들의 조상이 편애를 받은 것은 하느님의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지혜의 면에서도 다른 모든 이들을 압도하는" 박식가였기 때문이라는 점을 당연시했다. 그러니 아르다시르가 크테시폰을 장악했을 때, 메소포타미아의 두 지역이 도처의 유대인들에 의해 세계의 2대 학문 중심지로 손꼽히게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두 곳 수라와 품베디타는 거리상으로 수백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는데도 쌍둥이처럼 닮은꼴이었다. 유프라테스 강 서안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나, 주민들 배부분이 유대인이었고, 세계를 바꾸려는 야심을 지닌 예시바 yeshiva, 곧 학교를 보유한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것 등등이 그랬다.
** 답보다 많은 질문 **
* 이스마일의 후손들이 획득한 땅이 아랍제국이 아닌 다르 알이슬람 Dar al-Islam(이슬람의 집)으로 규정되고, 정복의 1세대 사람들도(비록 그들은 신자 혹은 이주민을 뜻하는 '무하지룬'으로 스스로를 칭했지만) '무슬림'이라는 매우 생소한 호칭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콘스탄티누스가 지난날의 아테나나 아르테미스보다 그리스도에게서 무한정으로 강력한 보호자를 발견했듯이, 꾸란을 믿는 사람들도 그 안에서 무한대로 강력한 천상의 군주를 찾아냈다. 하지만 너무도 강력하기에 그 신을 감히 인간의 형태로는 묘사하지 못했다. 그것이 기독교도들과 다른 점이었다. 그 분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슬람의 기원을 합리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역사가들이 가장 애를 먹는 부분은 꾸란과 그것의 유래에 얽힌 이야기에 어김없이 따라붙는 초자연적 아우라다. 메카에서 일신교가 출현한 것만 해도 예언자의 전기작가들에 따르면, 그곳은 애당초 유대인과 기독교도의 흔적조차 없이 거대하고 텅 빈 사막의 한가운데 위치한 이교도 도시였다. 그런곳에서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느닷없이 아브라함, 모세, 예수와의 관련성까지 갖춘 완벽한 형태의 일신교가 출현했으니, 역사가들로서는 기적으로 밖에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는 것이다. 어찌보면 이슬람의 기원을 찾기 위한 지금까지의 세속적 연구는 이 질문에 대한 설득력 있는 답을 찾는 과정이었다.
* 9세기 전에는 꾸란에 대한 주석서가 전무했다는 사실과, 서로 다른 이슬람 공동체들이 서로 다른 꾸란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그 미스터리를 더욱 심화시킬 뿐이다. (무슬림학자 이븐 무자히드가 7독송법을 확립해 꾸란의 정본이 되게 한 것도 10세기였다. 그러다 1924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단일 독송법에 따른 꾸란의 표준 편찬본이 만들어졌다는 것이 현대의 일반적 관점이다.)
* 이라크의 위수 도시들 성벽 너머에서도 아랍인의 종교를 시기심과 동경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랍의 통치가 점점 아브드 알말리크가 가졌던 이슬람의 비전과 동일시 됨에 따라, 지배자 사회에 진입하기 위해 신흥종교를 받아들이려는 사람들 또한 쇄도했다. 그러나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 아랍인들은 개종자들을 형제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이슬람으로 통하는 길목 곳곳에 수많은 돌들을 심어놓고 그것을 막으려고 했다. 결국 개종을 원하는 사람은 엄청난 모욕을 감수해야만 무슬림이 될 수 있었다. 페르시아인이든, 이라크인이든, 시리아인이든 신에게 복종만 한다고 해서 무슬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랍인 보호자에게도 복종해야만 무슬림의 대우를 받았다.
* 혼란으로 어리둥절해 있던 조로아스터교 난민들에게는 그와는 전혀 다른 신앙으로 가는 길도 열려 있었다. 기독교처럼 유서 깊거나 육중한 체계를 갖추고 있지 못한 신흥 종교 이슬람으로도 개종할 길이 열려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랍정복의 역사가 고작 100년밖에 안되는 시점이었으므로 카리프조의 지배 엘리트들은 그들을 "인두세를 내지 않으려고 개종했을 뿐 진지한 무슬림이 아니"라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중략) 아마도 배교자를 사형에 처하고, 하루에 다섯차례 기도하며, 칫솔 사용을 경건함의 징표로 삼은 조로아스터교의 옛 특징들이 이슬람에 도입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꾸란에는 배교가 처형이 아닌 지옥에 떨어질 행위로 묘사되어 있고, 기도 또한 하루 다섯차례가 아닌 세 차례만 해도 되는 것으로 나와 있으며, 칫솔은 아예 언급조차 없다.
* 이런 규정들이 무슬림 법학자들에 의해 일단 재가공이 되면, 먼 옛날부터 차곡차곡 쌓인 것 못지 않은 권위를 가진 것이다. 왈리드가 지은 거대한 모스크처럼 순나도 고대의 파편들로 새롭고 특별한 그 무엇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을 보여준 기념물이었던 것이다. 토라에서 끌어 모은 것, 조로아스터교 의식에서 건져 올린 것, 페르시아의 관습에서 따온 것, 이 모든 것들이 울라마가 이어 맞춘 전당의 구성물이었다. 수십년 동안 이어진 우마이야 왕조의 지배가 막을 내릴 무렵, 형태가 가장 또렷해진 울라마 노고의 결과물인 순나는 그리하여 가장 광신적인 총독마저 애써 무시하고 싶어했을 만한, 강력한 권능을 지닌 하느님의 뜻을 알리는 지침이 되었다. 실제로 그것은 피정복민들이 만들어낸 것 중에서는 제국 엘리트들의 욕망과 오만을 견제할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장치였다. 전쟁 포로의 자손이든, 조로아스터교도의 자손이든, 유대인의 자손이든 울라마를 구성한 사람들 대부분은 정복의 희생양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집단적 노력을 통해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스스로 쟁취해 낸 것이었다. 허울뿐인 지배자가 아닌 울라마가 하느님의 뜻을 조정하는 권한을 갖게 되었으니 말이다. 울라마는 이렇게 거의 문맹이던 사막의 전사 집단들이 전해준 신앙과 교리의 잡동사니들을 그 많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불과 1세기만에 법학자들의 종교로 탈바꿈시키는 놀라운 위업을 이룩했다.
* 이렇게 보면 로마인과 아랍인 모두 세계의 미래, 아니 어쩌면 전 우주의 미래가 콘스탄티노플의 운명으로 결정될 수 있다는 동일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된다. 콘스탄티노플의 궁극적 중요성은 고대 로마제국의 과거와 현재 영토의 관문이 되는 전략적 요충지라는 사실보다, 기독교도와 무슬림이 대결을 펼치는 그보다 한층 더 광대무변한 우주적 드라마의 무대라는 점에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도들 사이에서는 이스마엘의 자손들이 로마의 수도에 대규모 공격을 가한것이 실패로 돌아가서, 최후의 가장 위대한 카이사르, 다시말해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사산제국의 왕 호스로우 2세에게 거둔 것보다 더 큰 승리를 거두고, 그리하여 아랍인들로부터 예루살렘을 수복하여 그리스도의 복귀를 선도할 정복자로서의 카이사르가 도래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은밀히 전파되고 있었다. 무슬림들 또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종말의 날을 만들 기대에 부풀었다. 하지만 그런 기대를 하면서도 시간이 촉박하다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로마인들과 마찬가지로 무슬림들도 카이사르가 출현할 것이라는 예감, 그들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왕자가 태어나, 보통 아이라면 1년에 자랄 양을 하루에 쑥쑥 자란 끝에 열 두살이 되면 파괴적 영토 수복 전쟁에 나서, 육해군이 합동으로 칼리프 제국을 쑥대밭으로 만들 것이라는 예감이었다.
* "모든 공동체에는 그 나름의 수도원제도가 있느니, 내 공동체에서는 지하드가 그것이니라." 그러나 지하드가 암시한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무바라크(우마이야왕조의 10대 칼리프 히샴 말리크 치세때 활동한 투르크인이었던 이슬람 학자 압둘라 이븐 알무바라크)의 생애 내내 계속 모호한 상태로 남아있었다. <지하드의 문자적 의미도 '투쟁'이었고, 꾸란 역시 지하드를 경건한 폭력에의 헌신 못지 않게 무슈리쿤(다신론자)과의 효과적 논쟁과 자선행위, 그리고 어쩌면 노예해방도 의미하는 듯이 언급해 놓았다. 그런데 그 단어가 압둘라 이븐 알무바라크와 같은 전사학자들 -- 예언자를 그들의 본보기로 주장하는 일에 혈안이 되었던 -- 에 의해 점점 좁은 뜻, <하느님의 대의를 위해 싸우는 전투 행위>를 의미하게 된 것이다. '이슬람의 집'의 국경지대로 쳐들어가 완고한 기독교도들을 살해하는 행위가, 무슬림의 선택사항을 넘어 적극적인 의무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 그러나 이라크에는 그들(우마이야 왕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현란함 면에서는 시아파에 뒤졌지만 방법면에서는 그들보다 한층 효과적으로 우마이야 왕조를 거짓 무슬림이자 찬탈자로 매도하면서 예언자 이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나선 또 다른 가문도 있었다. 나바테아의 외진 농장에 기반을 두고 있던 쿠라이시족의 일원이어서 얼핏 보면 무명의 가문처럼 보였으나, 알고보면 무함마드의 숙부인 아바스를 조상으로 둔 아바스 가문이었다. 따라서 그 정도면 히샴의 죽음으로 어수선했던 시기에 체제 반항적인 울리마는 물론이고 증가 추세에 있던 무슬림들의 관심을 끌기에도 적격인 가문이었다.
* 옮긴이 글 -- 이슬람교에는 유대교,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 로마의 기독교적 요소뿐 아니라, 사마리아 종파, 마니교, 유대교적 기독교, 기독교적 유대교와 같은 고대 후기의 다른 이단 종파들의 요소까지도 가미되었다는 것이 차별화된 관점의 대표적인 예이다. 이슬람이, 무학자였던 예언자가 그 시대의 다른 종교 문헌들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 채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 아라비아의 사막에서 마른하늘의 날벼락처럼 태동한 것이 아닌, 그보다 훨씬 북쪽의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접경지에 연원을 둔, 동시대의 역사적 산물이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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