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서리가 내렸나 보다. 초록에서 누런 옷으로 바꿔 입었던 잔디가 백발이 되었다. 빅톨 위고는 레 미제라블에서 마들렌의 머리가 하룻 밤새 하얗게 세어 버렸다고 묘사하고 있다. 해가 뜨기 전 어스름한 여명속에 보니, 앞 마당 잔디가 하룻 밤 새 하얗게 머리가 세어버린 노인처럼 되어 버렸다. 요 며칠 밤, 기온이 떨어져 영하의 날씨가 이어지더니 잔디만 노인이 되어버린 것이 아니다. 10월 말까지도 화려하고 기품 있게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황금색 꽃을 피우던 프렌치 메리골드도 허리가 구부러지고 꽃송이마다 하얀 서리를 뒤집어 썼다. 군락을 이루며 아름다움을 뽐내던, 봄부터 가을까지 화려함과 고고함을 지고 또 피고를 반복하며 자랑하던 메리골드가 사나흘의 서리를 견디지 못하고 추한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허리가 구부러지고, 바람결에 따라 이리저리 넘어진 꽃송이를 보니 허무함마저 든다. '화무십일홍'이라 했던가? 겨우 6개월 동안 아름다움을 뽐내더니 늙고 추한 모습으로 생명이 솟구쳤던 대지로 다시 돌아가려 한다.
나이듬이란 이런 것인가? 죽음이란 이런 것일까? 마지막 떠나는 순간까지도 아름다움을, 고고함을 유지하고 떠날 수는 없을까?
오늘 아침, 서리가 내린 잔디와 메리골드를 보며 아름다움을 자랑하지 말고, 젊음을 뽐내지 말며, 나는 이 자리에서 영원하리라는 착각을 하지 말라는 교훈을 자연에서 배운다. 다시한번 겸손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한 때의 젊음과 아름다움과 힘을 자랑하지 말고 영원하리라는 착각도 하지 말며 겸손해야 한다는 말은 우주의 비밀을 알려주는 말이다. 새로운 별이 태어나고 팽창하다 폭발하여 사라졌다가 다시 태어나는 우주의 원리. 새 별로 태어나 수 백억년을 살다 초신성으로 되어 폭발하여 사라지면서, 새로 태어나는 별들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던 원소를 아낌없이 나누어 주는 별이 되는 것이 우주의 원리이고 생명의 순환이고, 겸손의 가르침이지 아닐까?
늘 겸손해야 한다. 나도 언젠가는 차가운 서리를 견디지 못하고 대지로 돌아가는 메리골드처럼 그렇게 떠나게 될 것이다. 하얗게 머리가 세어버린 백발 노인처럼 변한 잔디의 모습으로 떠나게 될 것이다. 떠나감은, 이별은 아프고 쓸쓸하고 슬픈 일이지만, 봄이 되면 다시 꽃이 피고 푸르른 잔디가 앞 마당 가득 생동하는 기운을 가져 오듯, 나도 셀 수 없는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생명의 기운을 되찾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My 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0년 10월 25일 Classic을 존중하되 시대적 변화의 흐름도 타자. (1) | 2023.11.21 |
---|---|
2023년 11월 19일 드뷔시의 달빛은 나를 사색하게 만든다. (2) | 2023.11.20 |
2020년 10월 22일 It's a long day. (0) | 2023.10.26 |
2020년 10월 21일 어지러운 하루가 지나가고... (0) | 2023.10.26 |
2020년 10월 20일 아버님! 평안히 쉬십시요. (0) | 2023.10.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