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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앙드레 지드, 좁은문

* 앙드레 지드 - 1869년 프랑스 파리 출생. 1909년 좁은문 발표(40세). 1947년 노벨문학상 수상.

* 첫머리 -  다른 사람들 같으면 이것으로 책 한권을 지어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여기서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내 온 힘과 기운을 다 바쳐가며 체험했던 이야기이다. 그래서 나는 아주 담담하게 내 추억들을 적어 나가려고 한다. 그리고 그  추억담들이 군데군데 동강난다 해도, 그것을 깁거나 맞추기 위해 어떤 기교를 부리지는 않겠다. 그런 꾸밈이 요구하는 노력이, 내가 이 추억을 이야기함으로써 발견하고 싶은 그 마지막 즐거움을 방해 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여의었을 때 나는 열 두살도 채 되지 못했었다. 아버지가 의사로 계시던 르아브르에 더 이상 머무를 이유가 없었던 어머니는 내가 파리에서라면 학업을 보다 잘해 나가리라 생각하고 파리로 가 살기로 작정하셨다. 어머니는 뤽상브르 근처에 있는 어느 작은 아파트를 빌리셨고, 이곳에 우리와 함께 미스 아슈뷔르통이 와서 살았다. 가족이 없는 미스 플로라 아슈뷔르통은 처음에는 어머니의 가정교사였는데, 이어 말벗이 되더니 마침내 친구가 되어 버렸다. 나는 똑같이 부드러우면서도 슬픈 표정에 늘 상복을 입고 있던 것이 지금도 생각나는 그 두 여인 곁에서 자랐다. 어느 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아주 오래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머니는 아침에 쓰는 모자의 검은 리본을 붉은 보라색 리본으로 갈아 다셨다. "오! 엄마, 그 빛깔은 정말 엄마에게 어울리지 않아요!"하고 나는 소리쳤다. 그 이튿날 어머니는 검은색 리본을 도로 다셨다.

* <하지만 굳이 약혼을 할 이유는 뭐야?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서로의 것이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라는 것을 서로 알고 있으면 충분치 않을까? 그녀를 위해서 내 온 생애를 바치고 싶어하는데, 내 애정을 어떤 약속으로써 얽어 맬 필요가 있을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맹세란 사랑에 대한 모독처럼 생각 돼. 만약 알리사를 믿지 못한다면 약혼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겠지.>

*  "내 곁에 와서 앉으렴"하고 아버지가 말했다. 그리고는 벌써 밤이 깊어 있는데도 아버지는 헤어지신 이래로 한번도 하지 않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기 시작했다. 어떻게 어머니와 결혼하게 되었는지, 얼마나 어머니를 사랑하셨는지, 그리고 처음에는 어머니가 아버지를 위해서만 사셨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것이었다. "아버지"하고 마침내 내가 말했다. "왜 꼭 오늘 저녁에 그런 이야기를 하셔야만 되었는지 말씀해 주세요."  "그건 말이다. 방금 전에 응접실로 들어오면서 소파에 누워 있는 너를 보았을 때, 잠시 네 어머니를 다시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야."

*  <인생의 행로에는 이따금 너무나도 고귀한 쾌락과 너무나도 애정어린 약속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금지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허용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토록 크나 큰 매력들은, 그것을 덕성 때문에 포기한다는 그 매력으로써만 뛰어 넘을 수 있는 것이다.>  - 라 브뤼에르-

* 그는 내일 떠난다…. 그리운 제롬, 나는 언제나 한없는 애정으로 너를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말을 네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내 눈에, 내 입술에, 내 영혼에 가하는 속박이 너무도 힙겹기 때문에 너와 헤어진다는 것이 오히려 내게는 해방이요 쓰디쓴 만족이기도 하다. 나는 이성적으로 행동하려고 애쓰지만 막상 행동을 하려는 순간에는 나를 움직여야 할 이성이 나를 저버리거나 아니면 어리석게 된 것처럼 보인다. 결국 나는 그것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된다. 그를 피해야 하는 이유는? 이미 나는 그런 것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그를 피해야 할 까닭도 모르면서 슬프게도 나는 그를 피한다.                                                                                                            

  주여! 제롬과 내가 둘이 함께, 서로 의지하면서 당신에게로 나아가게 해주시옵소서. 평생을 두 사람의 순례자처럼, 때로는 한 사람이 다른사람에게 "피곤하면 내게 기대"하고 말하면 다른 사람이, "네가 곁에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 만으로도 만족해…."하고 대답하면서 걸어갈 수 있도록 해주시옵소서. 아닙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길은, 주여, 좁은 길입니다… 둘이서 나란히 걸어갈 수 없는 좁은 길입니다.

* 퍽 늙어버린 것처럼 피곤하면서도 내 영혼은 이상한 童心을 간직하고 있다. 방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잘 정돈되어 있고, 침대 머리맡에는 벗어 놓은 옷들이 잘 개어져 있지 않으면 잠을 이룰 수 없는 나는 아직도 옛날의 그 소녀인 것이다.  죽을 준비도 그렇게 하고 싶다.

* 오늘 아침 구토증의 발작으로 기진맥진해 졌다. 발작이 그치자 곧 나는 너무도 기력이 없어서 잠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온몸에 아주 커다란 평온이 깃들었다. 그리고는 심한 고통이, 육체와 영혼의 전율이 나를 사로 잡았다. 그것은 마치 내 삶에 대한 돌발적이고도 명료한 '계시'와 같았다. 나는 내 방의 벽들이 지독하게도 장식이 없음을 처음으로 보는 듯 했다. 나는 무서웠다. 지금도 역시 안정을 찾으려고, 침착해지려고 이 글을 쓰고 있다.                                               

   '오오, 주여, 당신을 모독함이 없이 종말에 이르도록 해주시옵소서.'   나는 아직 일어설 수가 있다. 어린애처럼 무릎을 꿇었다. 나는 홀로 있다는 것을 다시 깨닫기 전에 지금 빨리 죽고 싶다.

*  마무리 -  "앉으세요"하고 그녀가 안락의자에 털썩 주저 앉으면서 말했다. "내 생각이 맞는다면, 오빠는 언제까지나 알리사 언니의 추억에만 충실하려고 작정하신 거예요." 나는 잠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보다는 오히려 언니가 나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에 대한 충실이겠지… 아니, 그런 일을 내가 자랑한다고 생각하지는 말아. 나는 그렇게 밖에는 달리 어쩔 수가 없으니까. 만일 내가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면, 나는 사랑하는 체하는 수 밖에 없을거야."   "아아!" 그녀는 흥미 없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는 내게서 얼굴을 돌리더니 뭔지 잃어 버린 것을 찾는 것처럼 방바닥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럼 오빠는 희망 없는 사랑이 자기 마음 속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간직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그래, 쥴리엣."   "그리고 날마다 생활이라는 것이 그 위로 바람을 보내도 그 사랑은 꺼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세요?"

   저녁 어스름이 잿빛 조수처럼 방 안으로 밀려와 물건들 하나하나에 미치며 침수시키자, 이 어둠속에서 그 물건들은 저마다 되살아나 낮은 목소리로 자기 과거를 이야기 하는 것 같았다. 나도 알리사의 방을 다시 보는 듯했다. 쥴리엣은 그 가구들을 전부 이곳에 옮겨 놓았던 것이다. 지금 그녀는 다시 내게로 얼굴을 돌렸지만 이미 그 윤곽조차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매우 아름다워 보였다. 그리고 우리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자!"하고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잠에서 깨어 나야죠."   나는 그녀가 일어서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한 걸음 앞으로 내딛더니 기운이 없는 듯이 다시 옆에 있는 의자에 주저 앉았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울고 있는 것 같았다.

   하녀가 램프를 들고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