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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엠마누엘 카레르, 리모노프LIMONOV

* Emmanuel Carrere -  < 특유의 저널리즘식 글쓰기로 탁월한 역량을 인정받으며 문단에 확고한 입지를 굳힌 현대 프랑스 작가. 비평가들은 그의 소설을 두고 <문학적 다큐멘터리>, <작가 자신의 에고를 벗어던지고 얻어낸 문학적 성취>라고 말한다. 1957년 파리 16구의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파리에서 살고 있다. 파리정치대학에서 공부했고, 2011년 발표한 <리모노프>로 그해 르노도상, 문학상의 상 등을 수상했다.>

"공산주의를 복원하고 싶다면 머리가 없는 사람이다.  공산주의를 그리워하지 않는다면 심장이 없는 사람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

첫머리 -    2006년 10월 7일, 자신이 살던 아파트 계단에서 살해되기 전 까지만 해도, 블라디미르 푸틴의 정책에 공공연히 반대해 왔던 안나 폴리코프스카야라는 용감한 여기자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체첸 전쟁을 관심 있게 지켜보던 소수에 불과했다. 이 사건이 터지기 무섭게 우수에 찬 그녀의 결연한 얼굴은 표현의 자유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서방 세계에 각인되었다. 당시에 수시로 러시아에 드나들며 한 소도시에서 다큐멘타리 촬영을 마치고 막 귀국해 있던 나는, 사건 보도 직후 잡지사에서 원고 청탁을 받고 급히 다시 모스크바로 날아갔다. 

*    나는 추모식에 참석했다. 극장 앞 광장에 얼추 2 ~ 3백 명의 추모객이 모였고, 주변에는 투구와 방패, 묵직한 곤봉으로 무장한, 우리의 CRS에 해당하는 오몬 대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하늘이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중략) 계단 꼭대기, 닫힌 극장 문 앞에 막연히 구면이라는 느낌을 주는 실루엣이 하나 보였는데, 딱히 이름은 생각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처럼 초를 들고 선 검정색 코트 차림의 남자는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과 조용조용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좌중을 압도하며 한 가운데 서서 은근히 이목을 끄는 품새가 저명인사인 듯한 그를 보면서, 우스꽝스럽게도 나는 밀착 경호를 받으며 부하의 장례식에 참석한 갱단 두목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 뒤통수에 가려 아주 살짝 드러난 옆얼굴과 올려 세운 외투 깃 밖으로 나온 염소수염이 내 눈에 보인 그의 전부였다. 내 옆에 있던 여자가 나처럼 그를 발견하고는 함께 서 있던 여자에게 말했다. "에두아르드가 왔네. 잘 됐어." 멀리서도 이 말을 들은 듯, 그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촛불 위로 그의 이목구비가 선명히 드러났다.                  내가 아는 리모노프였다.

*   리모노프는 어떤가. 우크라이나 출신의 깡패로 출발해 소비에트 언더그라운드의 아이돌, 맨해튼의 거지, 억만장자의 집사를 거쳐 파리의 인기 작가로, 발칸반도를 헤매던 사병으로, 그리고 이제는, 공산주의 붕괴 이후 혼란기에 청년 무법자들의 당을 이끄는 카리스마 넘치는 늙은 보스로 변신해 있다. 스스로는 영웅이라고 자부하지만, 남들 눈에는 인종지말로 비칠 수도 있다. 이 점에 대해 나는 판단을 유보하고 싶다. 다만, 세면대에 얽힌 일화를 별 생각 없이 재밌게 듣고 나서 그의 파란만장하고 위험천만한 인생이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모노프, 그 자신과 러시아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우리 모두의 역사에 대해서 말이다.                      어떤 메시지가 있긴 있는데, 그게 과연 무엇일까? 그것을 찾고 싶어 나는 이 책을 시작한다.

제 1 장  우크라이나 1943년 ~ 1967년

    이야기는 1942년 봄, 혁명 이전에는 라스티아피노, 1929년 이후로는 제르진스크로 불리는 볼가 강 유역의 한 도시에서 시작된다.

   <진실을, 꼭 명심해야 한다. 우리 에디치카. 인간이란 본래 비겁하고 비열해. 언제든 네가 먼저 칠 준비가 안 돼 있으면 상대가 널 죽이려고 달려들 거야.>

*   러시아 혁명 직후 내전기에 赤軍(적군)의 사령관을 맡은 트로츠키는 제정 러시아 군대 출신의 분자들, 즉 직업군인들을 울며 겨자 먹기로 기용해야 하는 입장에 처했다. 아무리 군 전문가라지만 <부르주아 전문가>이기 때문에 사람 자체가 신뢰가 가지 않았던 트로츠키는, 이들을 관리 감독하고, 이들이 서명하는 문서에 연서하고, 반발할 경우 처치하는 임무를 수행할 정치 지도원 조직을 만들었다. 이렇게 탄생한 <이중행정> 원칙은 한 가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사람, 즉 임무를 수행하는 당사자와 임무 수행이 철저히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에 입각해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감독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기반하고 있었다. 군대에서 출발한 이 원칙은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었고, 그 과정에서 두 번째 사람을 감시할 세 번째 사람. 또 세 번째 사람을 감시할 네 번째 사람, 또.... 이런 식으로 계속 사람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    그는, 세상에는 때려 눕힐 수 있는 사람과 그럴 수 없는 사람, 이렇게 두 부류가 존재하는데 어떤 사람이 상대보다 힘이 세고 훈련으로 단련된 몸이라서 때려 눕힐 수 없는 게 아니라 <살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는, 결정적 깨달음을 얻었다.

*    우리의 <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벌자>와 비슷하게 당시 소련 사회에 퍼졌던 유행어가 <우리는 일하는 척하고, 저들은 우리에게 급료를 주는 척 한다.>였다.

*    숙청과 공포의 시대가 저물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으므로 이런 인생 행로는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혁명이 제 새끼들을 잡아먹던 시절은 가고 권력은, 안나의 표현을 빌자면, 식물성으로 변해 있었다. 니키타 흐루쇼프 집권하에서는 치안과 생활 수준 향상, 아이들이 더 이상 부모의 고발자로 내몰리지 않는 행복한 사회주의적 가족의 확대 등의 합리적이고 선량한 목표를 표방하는 찬란한 미래가 펼쳐지는 듯했다. 스탈린 사후에 제크(죄수) 수 백만명이 동시 사면되고, 일부는 복권까지 되는 묘한 분위기의 시절이 있었다. 

*    술에 취한 주인공, 술에 취한 기차, 술에 취한 승객들, 술에 취한 작중 인물들은 모두 <러시아에서 쓸만한 사람들은 다 고주망태>라는 믿음이 확고했다. 절망에 싸여, 거짓의 세계에서는 오로지 취기만이 거짓을 말하지 않으므로, 예로페예프는 일부러 익살스럽고 과장적인 문체를 통해 소련식 허언을 패러디하고, 레닌과 마야코프스키, 사회주의 리얼리즘 대가들의 말을 왜곡했다

*    70년대에 들어와 어렵긴 해도 이민이 가능해지면서, 이민을 신청하는 사람들은 신청이 받아들여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방문이나 단기여행으로도,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러 올 수조차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사람들은 고민했고, 떠나고 싶어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그쳤다. 정권에서는 분명히 이 점을 계산에 넣고 안전판을 열어주었을 것이다.

제 3 장.  뉴욕, 1975 ~ 1980년

    지도는 신빙성에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다. 오른쪽 두번째 길이 세인트 마크스 플레이스라고 표기돼 있으면 어김없이 세인트 마크스 플레이스가 나왔다. 소련에서는 어렵게 지도를 구해도 지난 전쟁때 제작된 것이거나, 대규모 도로공사를 예측해 15년 후의 이상적인 도시 모습을 가상으로 그린 것이거나, 아니면 관광객은 십중팔구 스파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해 순전히 골탕을 먹이겠다는 의도로 제작된 것이어서 영락없이 틀린 길로 안내할테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을 터였다.

제 4 장. 파리, 1980 ~ 1989년

    어머니는 소련을 러시아와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다민족 모자이크 사회인 소련이 그럭저럭 결속을 유지해 가고는 있으나 인종과 언어, 종교적으로 소수인 민족들, 이들중에서도 특히 회교도 소수 민족들의 불만이 증폭되고 있다. 게다가 인구수까지 급속한 증가세를 보이는 상황에서 결국 이 회교도들이 다수가 되어 러시아의 헤게모니를위협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1978년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이 앞으로 몇 세기 동안은 소련 제국이 건재하리라고 믿고 있지만, 이 역시 심각한 착각이다. 소련 제국은 흰개미 떼 같은 다민족들한테 야금야금 갉아 먹히다 끝내 붕괴될지도 모른다. 

*    에두아르드는 자신은 지식인이 아니고 프롤레타리아다. 진보주의자도 노조원도 아닌 그저 의심 많은 프롤레타리아다. 프롤레타리아들은 늘 역사에 배신당한다는 이치를 깨달은 프롤레타리아라고 항변하듯 선포했다. (중략) 에두아르드가 한술 더 떠 자신은 노동자 출신이지만 노동자들을 경멸한다. 자신은 예나 지금이나 가난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경멸한다. 그들에게 한 푼도 적선하지 않는다고 하자 헝가리 작가들은 사색이 되었다.  

*    전체주의의 속성은 눈에 검정색이 보이는 사람들에게 흰색이라고 말하게 하고, 이것을 되풀이하다 못해 종국에는 진짜로 그렇게 믿도록 강요하는 것인데, 이런 권위주의적 측면에 있어 소련은 사민주의 독일보다 훨씬 극단적인 양상을 보였다. 소련의 경험이 지니는 환상성, 끔찍하면서도 동시에 끔찍하게 희극적인 환상성은 바로 이러한 측면에 기인하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러시아 전공 역사학자 마틴 말리아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전체적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특정한 악습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공격이다. 이것은 현실을 폐기하려는 기도이고, 이러한 기도는 장기적으로는 실패하지만 일정 기간 동안은 비효율과 결핍, 폭력을 최고의 선으로 간주하는 모순이 지배하는 초현실적 세계를 만들어낸다.                                                                                                                                                                                                 현실의 폐기는 기억의 폐기를 통해 이루어진다. 토지의 집단화, 처형되거나 강제 수용된 수백 만명의 <쿨락>들, 스탈린이 조작한 우크라이나의 기근, 30년대에 자행된 숙청들, 순전히 임의적으로 처형되거나 강제 수용된 또 다른 수백 만명의 사람들, 이 모든 게 없었던 일이 되었다. 1937년에 열살배기던 아들 딸들이 어느 날 밤에 사람들이 들이닥쳐 아버지를 잡아간 후로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됐다는 것을 모를리 없었다. 하지만 그 일을 입에 올려서는 안되며, 인민의 적이 된 사람의 자식으로 사는 위험을 감수하느니 차라리 없었던 일로 눈 감는 게 낫다는 것 또한 모를 리 없었다. 이렇게 소련 전체가 이 모든 것을 없었던 일로 치부했고, 스탈린 동지께서 친히 수고로이 집필하신 <소련 공산당 역사 강의>로 역사를 배웠다                           

*    옛날에는 사는 게 고생스러웠어도, 구시렁구시렁 불평은 하면서도 전반적으로 자긍심을 느꼈다. 가가린, 스푸트니크 인공위성, 강한 군대, 광할한 제국의 영토가 있다는 사실이, 서양보다 공정한 사회에서 산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글라스노스트> 이후로 고삐가 풀린 언론의 자유 때문에 맞은 편의 사내같은 소박하고 순순한 사람들의 머릿속에 1917년부터 이 나라를 지배한 자들은 모두 사디스트이고 살인자이며 작금의 참패를 불러온 장본인이라는 사고가 각인되었다고 에두아르드는 판단했다. (중략) 지난 70년 동안 우리가 최고라고 세뇌를 받았지만 실제로 우리는 패배자들이었다고. <브쇼 프라이그랄리(폭삭 망했다)>. 70년 동안 열심히 노력하고 희생한 대가가 이것이라고, 똥통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고.

*    전쟁을 하면 삶과 인생에 대해 두 시간이면 배울 것을 평화로울 때는 40년이나 걸려야 배운다고 그는 생각했다. 전쟁은 추악하다. 사실이다. 전쟁은 미친 짓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지나치게 무기력하고 합리적인, 본능을 억누르는 문명의 삷도 결국 미친짓이기는 매한가지 아닌가. 전쟁이 쾌락중에서도 최고의 쾌락이라는 것은 어느 누구도 함부로 입에 담지 못하는 진실이다. 한 번 맛을 들이면 헤로인과도 같은 전쟁의 중독성을 알게 된다. 물론 남의 땅에서 헌병노릇은 하고 싶지만 보졸들의 귀한 목숨을 담보로 <지상>에서 전투를 하기는 싫어 <외과적 타격>을 비롯한 온갖 구저분한 짓거리를 하는 미국놈들이 벌이는 전쟁이 아니라, 진짜 전쟁을 두고 하는 말이다. 전쟁의 맛, 진짜 전쟁의 맛은 사람한테는 평화의 맛처럼 자연스럽기 때문에, 평화는 좋고 전쟁은 나쁘다는 고매한 소리로 이 맛을 없애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남녀의 존재가 그렇듯 현실에서는 <음양>의 이치처럼 이 둘 모두 필요하기 때문이다.

*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성장했지만 과감하게 공산주의와 절연한 용기있는 사람이 바로 옐친이었다. 그는 러시아 역사상 최초로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통령이었다. 라파예트가 바스티유를 접수했듯 그는 화이트 하우스를 수호했고, 사람들의 의식을 옥죄던 당의 존재가 위법이라고 선포했으며, 소속 국가들을 옭아매던 연방을 해체했다. 2년만에 그는, 한마디로 위대한 역사적 인물로 등극했다. 그가 이 여세를 몰아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를 수립하고 그동안 후진성과 불행을 면하지 못하던 나라에 새로운 사회의 싹을 틔울 수 있을까?           경제문제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자각한 옐친은 러시아의 오동통한 자크 아탈리(유럽부흥개발은행의 총재를 지낸 프랑스의 저명 경제학자)라고 할 수 있는 젊은 천재 예고르 가이다르를 전격 발탁했다. 고위 노멘클라투라 출신의 공산주의자인 가이다르는 자유주의의 절대적 신봉자로, 지금까지 어떤 시카고학파의 경제학자도, 로널드 레이건이나 마거릿 대처의 경제자문을 맡았던 어떤 전문가도 그만큼 시장의 미덕을 열렬히 믿은 사람은 없었다. 어떤 형태로든 단 한 번도 시장 체제를 경험해 보지 못한 러시아는 심대한 도전에 직면했다

*    옐친과 가이다르는 표트르 대제이래 역사상 모든 소련 개혁가들의 발목을 잡았던 반동적 움직임을 원천봉쇄하기 위해서는 신속히, 아주 신속히 행동에 나서야 할 뿐 아니라 강압적인 방법을 동원할 수 밖에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를 위해 내린 극약 처방을 이들은 <충격 요법>이라고 명명했는데, 그 표현이 전혀 무색하지 않은 충격적인 조치였다.

*    제일 먼저 가격 자유화가 실시되었다. 하지만 인플레율이 2,600퍼센트까지 치솟았고, 가격 자유화와 동시에 단행된 <채권 발행을 통한 사유화> 조치도 실패로 끝났다. 1992년 9월 1일, 정부는 만 1세 이상의 전 국민에게 각자 국가 경제에서 가지는 지분을 돈으로 환산해 1만 루불짜리 채권을 우편으로 발송했다. 지난 70년동안 원칙적으로 개인이 아니라 오로지 집단을 위해서 일해야 했던 사람들에게 일에 대한 동기를 유발해 기업과 사유 재산, 한마디로 말해 시장을 활성화하겠다는 것이 이 조치의 의도였다. 그러나 발송된 채권을 수신인이 받았을 때는 이미 인플레이션 때문에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었다. 채권의 가치가 고작 보드카 한 병이라는 사실을 안 수혜자들은 결국 한 병 반 값을 쳐주겠다고 흥정을 걸어오는 약삭빠른 자들에게 무더기로 되팔았다

*    몇 달 만에 석유 부호로 등극한 이 약삭빠른 자들은 보리스 베레조프스키와 블라디미르 구신스키, 그리고 미하일 코도르코프스키다. 이 사람들이 다가 아니지만 고생스럽게 일일이 다 기억할 필요는 없다. 이 셋은 앞으로 이 책에서 '올리가르히'라는 세력을 대표해 아기 돼지 삼형제의 첫째, 둘째, 셋째처럼 쓰이게 될 것이다. 젊고 똑똑하고 정력적인 이 사업가들은 타고나기를 부정직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사업에 천부적 감각을 지녔으나 사업을 금지하는 환경에서 자란 이들에게 규칙도, 법도, 은행 시스템도, 세제도 전혀 없는 상태에서 하루 아침에 <해 봐!>라는 허락이 떨어진 것이었다. 서부 개척시대와 다름 없었다.

*    수완 좋은 1백만명이 <충격요법>덕에 벼락부자가 되는 사이 나머지 1억 5천만명의 꽁다리들은 빈곤에 시달렸다. 물가는 지속적으로 올랐지만 임금은 물가 상승을 따라가지 못했다. 리모노프의 아버지 같은 KGB 장교 출신의 은퇴자들이 연금을 털어 살 수 있는 물건이라야 기껏 소시지 1킬로그램이 전부였다. 드레스덴에 파견돼 첩보 분야에서 경력을 쌓은 고위직 KGB 장교도 동독이 사라진 후 긴급 귀국 명령을 받고 돌아와서는 직업도 관사도 없이 고향인  레닌그라드에서 리모노프처럼 <신러시아인들>을 저주하며 무허가 택시 영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 장교는 통계에 등장하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었다. 그의 이름은 블라디미르 푸틴, 나이 40세, 리모노프처럼 소비에트 제국의 해체야말로 20세기 최대의 참극이라고 믿는 그는 후에 강당히 비중있는 역할을 맡게 된다.

*    1987년 기준으로 65세였던 러시아 남성의 평균 수명이 1993년에는 58세로 줄어들었다. 텅 빈 상점들 앞에 우울하게 늘어선 긴 줄, 소련시절의 이 익숙한 풍경은 추위 속 지하도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보잘 것 없는 재산을 내다 파는 노인들의 행렬로 바뀌었다. 살기 위해 팔 수 있는 것은 죄다 팔았다. 가난한 퇴직자들은 절인 오이 일 킬로그램, 티코지(찻주전자의 온도를 유지하기 위한 보온 덮개) 한 장을 팔았고, 버젓이 사기업을 설립하고 군 장비를 팔아 이익을 챙기는 비양심적인 장군들 중에는 탱크와 비행기를 거래하는 자들도 있었다. 판사는 판결을, 경찰은 관용을, 공무원은 직인을, 아프가니스탄 참전 용사는 살인 기술을 팔았다. 살인 청부는 건당 1만 달러에서 1만 5천 달러 사이에서 거래가 이루어졌다. 1994년, 모스크바에서 암살된 은행가만 50명에 이르렀다. 

*    거물들은 콤비나트나 천연자원 매장지를 놓고, 피라미들은 가판대나 시장 좌판을 놓고 서로 혈투를 벌였는데, 손바닥만 한 가판대든 손바닥만 한 시장 좌판이든 무조건 <지붕>이 필요했다. 이것은 난립 중이던 경호업체들에 붙여진 이름으로, 서비스 제의를 마다하면 총질부터 하는 자들이라는 점에서 갈취를 일삼는 강도 집단과 하등의 차이가 없었다. 구신스키나 베레조프스키 같은 올리가르히 소유의 <지주회사>들은 자신들의 재능을 활용해 돈벌이에 나선 고위 KGB 장교들이 지휘하는, 정규 부대나 다름없는 경호 인력을 고용했다. 조금 더 소박한 수준에서 지붕이 필요한 사람들은 그루지야나 체첸, 아제르바이젠 출신의 마피아 절반, 마피아 등으로 전직한 경찰 출신 절반으로 경호 인력을 충당했다. 

*    이 청년들은 가난했다. 일을 한다고 해 봤자 고작 짐을 싣거나 부리는 일, 마당 청소나 회반죽 개기 같은 잡일, 이들의 어머니가 받는 월급으로는 반세기를 모아야 살 수 있는 사륜구동 차들이 눈 진흙탕을 튀기며 들어오는 주차장에서 경비를 서는 일이었다. 기껏해야 자신들보다 한두 살 위지만 훨씬 약아빠진 놈들이 휴대폰을 들고 꽥꽥거리며 고급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이들은 경멸하듯 아니꼽게 쳐다보았다. 자하르와 그의 친구들이 열대여섯 살 정도 먹었을 때 공산주의가 무너졌다. 소련 체제하에서 그들이 보낸 유년기는 청소년기나 청년기보다 행복했다. 모든 것에 의미가 있었고, 돈은 많이 없었지만 돈을 주고 살 것 역시 많이 없었고, 집 안은 깔끔했고, 어린 소년이 콜호스(소련의 집단농장) 전체에서 제일 트랙터를 잘 모는 할아버지를 우러러봤던 시절을 떠올리며 그들은 흐뭇한 향수에 젖곤 했다. 그들은 평범하지만 자긍심이 넘치던 부모들의 좌절과 수모를 곁에서 지켜보았다. 가난에 쪼들리는, 무엇보다 자긍심을 잃어버린 부모를, 나는 그들이 무엇보다 참기 힘들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으리라 짐작한다.

에필로그. 모스크바, 2009년 12월

      푸틴은 러시아 사람들이 꼭 듣고 싶어하는, 아래처럼 요약할 수 있는 내용의 말을 다양한 방식으로 누차 해온 사람이다. <1억 5천만 명에게 그들이 살아온, 그들의 부모, 또 그들의 조부모가 살아온 60년의 세월, 그들이 지키기 위해 투쟁하고 희생해 왔던 것, 그들이 숨 쉬던 공기와 다름없던 것, 이게 전부 쓰레기라고 말할 권리는 우리한테 없다. 공산주의가 끔찍한 짓도 했다. 동의한다. 하지만 나치즘과는 달랐다. 서방 지식인들이 이제 아주 당연하게 두 가지를 동일시하는 것은 모욕이다. 공산주의는 위대하고 영웅적이며 아름다운 어떤 것, 인간을 신뢰하고 인간에게 신뢰를 준 어떤 것이었다. 그 속에는 순결함이 있었다. 그래서 뒤를 이은 야멸찬 세상에서 누구나 그 시절을 생각할 때마다 어렴풋이 자신의 유년기를, 불현듯 가슴이 북받치며 눈물이 쏟아지는 유년의 기억을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