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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왓슨, 거대한 단절 Great Divide

* 피터 왓슨 -   1943년 영국 출생.더럼대, 런던대, 로마대에서 공부. 좌파 시사주간지 <뉴소사이어티> 부편집장을 지냈고, <선데이 타임스> 탐사보도팀에서 4년간 일했다.

* 작가의 말 - <  고든 브러더스턴은 <제4세계의 책, 그들의 문학을 통해 어메리카 인디언 읽기, 1992년>에서 메소아메리카 Mesoamerica의 달력이 서양인들이 처음 만든 달력보다 훨씬 더 정교하다고 밝히고 있다. 찰스 만은 <1491: 콜롬버스 이전 남북 아메리카의 새로운 관계, 2005>에서 메소아메리카의 365일력이 동시대 유럽인들의 달력보다 더 정확했으며, 기원전 1,000년 고대 볼리비아 땅인 티와나쿠의 인구는 이미 11만 5천명에 달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참고로 프랑스 파리의 인구가 이 정도 규모에 이른 것은 5세기 말경이었다. 또한 그의 주장에 따르면 왐파노아그 인디언의 가족관계는 침입자인 영국인보다 훨씬 더 강한 유대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그들은 영국인이나 프랑스인보다 더 청결했다. 또 인디언의 모카신은 영국 부츠보다 훨씬 더 편안하고 방수 효과가 뛰어났으며, 아스테카 황제의 존재감은 유럽의 황제들보다 훨씬 더 강력했다. 더욱이 아스테카 왕국의 수도였던 테노치티틀란에는 유럽에 존재 하지 않는 식물정원이 있었다.>

* 서문 -     기원전 1만 5000년경 처음으로 고대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들어왔고, 그 시기로부터 기원후 1500년대까지, 즉 콜롬버스가 산 살바도르에 상륙할 때까지 지구상에는 '완전히 분리된 두 집단'이 존재하고 있었다. 서로에 대해 전혀 모른 채 한쪽은 신세계에서, 다른 한쪽은 구세계에서 살아온 것이다.  이 분리된 집단은 서로 다른 환경과 기후, 서로 다른 식생과 동물환경에서 살아왔다. 알다시피 두 반구의 '자연'은 전혀 다르다. 처음에는 유사했겠지만, 1만 6,000년 이상(600~800세대가 대를 물려온 기간)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인간은 각자의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함으로써 서로 다른 생존 전략과 관습, 언어, 종교 등의 문화를 일궈냈다. 

                각기 다른 두 세계가 서로 다른 세 가지 현상에 의존했을 뿐만 아니라 지배를 받았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 첫 번째로 광활한 구세계 대륙은 동지중해에서 중국에 이르기까지 계절풍 기후인 '아시아 몬순'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으로, 전 세계 농부의 3분의 2가 이 몬순 기후에 의지하여 생활해 왔다. 그러나 과거 8000년 동안 몬순의 위력은 서서히 약해졌다. 이는 구세계의 종교가 '풍요'에 관심을 두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두 번째로 '포유동물의 사육'이 구세계의 고대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으며, 특히 사회 내부의 경쟁이나 전쟁 방식 또는 그 범위에 영향을 끼쳤다. 이와 반대로, 신세계는 극단적인 (난폭한) 기후의 영향에 지배당했다. 세 번째 현상으로 다양하고도 풍부한 '환각성 식물을 광범위하게 활용'하는 것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모든 요인은 아메리카에서 종교라는 이데올로기를 훨씬 더 활발하고 강력하게 작동시켰으며 종말론적인 색조를 갖게 했다.

*  메소아메리카의   4대 문명 - <아즈텍 Aztec, 미스텍 Mixtec, 사포텍 Zapotec, 마야 Maya>

** 제1부 제1장 - 아프리카에서 알래스카까지 **************************************************

* 아프리카를 떠나다 = 유전자, DNA, 특히 미토콘드리아 DNA(보통 mtDNA로 표기되며 어머니로부터 물려 받는다.)와 Y 염색체(남성을 결정하는)의 발견 덕분에, 전문가에 따르면 미토콘드리아는 우리 내부에 누적된 모계의 역사를 제시해 주며, Y염색체는 부계의 역사에 대해 알려준다.  현대 인류는 대략 15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진화했다.

* 12만 5000년 전, 어느 집단이 아프리카를 떠나(지금보다 70미터 정도 수위가 낮은) 홍해의 남단에 위치한 바브에만데브 해협을 건넜고, 호수와 강이 있는 지금보다 훨씬 습했던 아라비아 반도를 가로질러 여행했다.                        오늘날 인류의 유전적 증거를 볼 때 '모든' 비아프리카인들은 그 무렵 아라비아 반도를 통과했을 작은 집단의 후손인 것이 확실하다. 건기동안 제벨 파야(호르무즈해협 근처의 바위 은신처)의 사람들은 수백 년 혹은 수천 년동안 격리된 채 사막 내륙지역에서 동쪽의 페르시아 만으로 흐르는 강을 따라 이동했을 것이다. 그후 바다를 건너 이란과 파키스탄을 경유하여 인도에 도착했을 것이다. 세계 인류의 형성에 관하여 제기된 '해안채집 beach-combing생활 이론'은 유전적 증거를 비롯하여 해안가 현장에서 발견된 수많은 조개 무덤(패총)으로써 그 타당성이 입증되었다. 게다가 6000년 전의 해수면은 지금보다 낮았기 때문에 육지는 16만 평방킬로미터 정도였을 것이다. 이 규모는 거주 면적의 10퍼센트 정도로, 중요한 자원이 많았다. 또한 일반적으로 바닷가 환경은 영양이 풍부한 먹을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에, 내륙보다 더 많은 인구가 정착할 수 있었다. 

* 아프리카를 떠난 집단의 규모는 크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Y염색체의 연구 결과에 따른 것으로, 그 집단은 번식능력을 지닌 1000명의 남성과 같은 수의 여성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아이들과 노인이 동반했다 하더라도 대략 5000명 정도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들은 함께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냥 수렵인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그들은 150명 정도로 구성된 집단을 선호했으며, 해안채집생활을 중단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 7만년 전, 사람들은 오스트레일리아로 건너오기 시작했다.

 * 5만 ~ 4만 6000년 전, 해안을 떠나 지금의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북쪽과 서쪽으로 이주한 집단은 유럽에 정착했다. 

 * 4만년 전 무렵, 두 번째 분화가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여러집단이 중앙아시아 내륙으로 들어가 파키스탄과 북인도로 향했다. 이때 해안채집생활을 하던 사람들은 동남아시아의 모퉁이를 돌아 중국 영역에 도착했으며, 그후 실크로드를 따라 계속 서쪽 내륙으로 이동했다.

 * 3만 ~ 2만년 전, 파키스탄과 인도에서 내륙으로 향했던 집단은 두 갈래로 분화되었다. 한 무리는 서쪽으로 향하여 유럽에 정착했고, 다른 무리는 시베리아 깊숙이 들어가 중국 내륙으로 이동한 무리들과 만났을 것이다. 

 * 2만 5000 ~ 2만 2000년 전, 인류는 시베리아와 알래스카를 연결하는 베링육교에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축치 Chukchi 또는 알래스카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1만 5000년 전으로 추정된다. 그 당시는 11만 ~ 1만4000년 전까지 지속된 빙하기의 마지막 시기로, 지구를 덮고 있는 엄청난 규모(두께가 수 킬로미터나 되는)의 빙하에 상당한 양의 물이 가두어진 상태였다. 그 결과 세계의 바다 수위는 지금보다 약 120미터 더 낮았고, 나아가 당시 지구의 지형이 지금과는 많이 달랐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오늘날의 베링 해협이 당시에는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이 지역은 육지였거나 연못 또는 호수가 있는 목초지였으므로 초기의 인류집단은 쉽게 통과할 수 있었다. 이로써 대략 2만 ~ 1만 4000년 전 사이의 어느 시기에 초기 인류는 신세계 또는 아메리카나 서반구 등으로 불리게 되는 땅에 정착하게 되었다. 1만 4000년 전부터 빙하기가 끝나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베링 해협은 차차 물로 채워지고, 알래스카와 시베리아는 분리됨으로써 서반구(아메리카, 신세계)는 마침내 구세계와 분리되었다. 

 * 홍해 남단에서 시베리아 동쪽 끝에 위치한 우예렌 Uelen까지 까마귀(또는 보잉 747 점보 제트기)가 비행할 때 약 1만 2000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날아간다. 그러나 인도와 동남아시아 주변의 해안선의 거리는 그보다 두 배 심지어 세 배 가까이 되고, 중아아시아 대륙을 가로지른다고 해도 그 거리가 단축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3만 2000킬로미터의 거리를 이동하기까지 족히 5만년 정도의 세월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