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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바드대학 출판부 외, 세계사 1945 이후 / 서로 의존하는 세계

* 서문 -  "  "편견 없는 사람은 역사를 흥미롭게 쓸 수 없다." 영국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이며 평화 투사인 버트런드 러셀이 회고록에서 한 말이다. 러셀은 분명 옳았다. 이 책의 저자들은 역사가로서 그 말에 동의할 것이다. 그들은 모두 자신만의 관점, 다시 말해 러셀이 말한 그 '편견'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독자들은 이 책의 저자들이 몇 가지 생각을 공유하고 있음도 알게 될 것이다. 먼저 우리는 1945년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최근 수십년 동안의 역사로 규정될 수 있는 '현대사'에 관해 신선한 관점을 제공할 생각이다. 둘째, 우리는 이 역사를 단순하게 각기 분리된 민족사나 지역사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지구적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신념을 공유한다.  셋째, 가장 중요한 공유점은 이 지구사가 여러 층위로 구성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그 층위들은 대부분 중첩되지는 않지만, 서로 연관되어 있다. 우선 따로따로건 집단적으로건 개별 국가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세계사가 존재한다. 1945년 이후의 역사에서 그것은 주로 냉전의 큰 틀로 포괄되었다.                                            현대사를 온전히 이해하는데 필요한 일국적, 국제적 양상들은 그것 외에 많다. 기본적으로 지정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층위와는 별도로 나름의 고유한 동력을 갖고 발전한 또 다른 층위들도 존재했다. 하나는 경제, 또 다른 하나는 문화였다.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역사를 다루며 사람과 공동체, 이념과 상품들 사이에 전례없는 규모로 경계를 넘나드는 상호작용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 결과 우리는 정치와 경제, 사회, 문화 등 어떤 주제를 다루든 결국 민족과 문명과 개인의 운명, 그리고 자연생활환경등은 모두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이 하버드-C.H.베크 세계사 시리즈의 5권인 <하나로 연결되는 세계사>의 저자들은 1870년에서 `1945년 사이에 세계가 점점 초민족적이 되었다는 데 유의했다.  1945년 이후에도 같은 흐름이 이어졌다. 세계의 변화와 관련해 1945년을 전후한 두 시기가 어떤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는지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1945년 이전에도 세계는 기술혁신과 경제 교역으로 구석구석 밀접히 연결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너무도 확연히 여러 방식으로, 즉 식민주의자와 피식민자, 자본과 노동, 서구와 비서구, 문명인과 비문명인, 그리고 무엇보다 '열강'과 '약소국'으로 분열되었다. 달리 말하면 초국가화는 두 형태를 띠었는데, 하나는 인류의 결속을 위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분열을 겨냥했다

    1945년 이전에는 변화의 동력이 주로 서구에서 발전한 근대 기술과 이데올로기였다면, 1945년 이후에는 문자 그대로 수백만 명이 개인으로든 집단으로든 그 과정에 참여해 앞서 존재했던 수많은 분리의 장벽들을 없앴다. 비서구 지역의 국가와 사람들은 서구가 만들어 놓은 세계에 적응하기보다는 스스로 적극적으로 역사를 만들어 나갔다."

* 머리말 -    유럽 국가 체제의 우위는 근대 세계사회의 등장이후 지속되었고 산업화 과정에서 강화되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으로 종말을 고했다. 생산력과 무기 기술의 발전으로 유럽 열강의 자율성이 점차 의심스럽게 된데다, 미국이 산업국가의 선두로 치고 올라서면서부터 유럽 국가 체제의 우위는 흔들렸다. 그래도 그 우위는 어쨌든 제1차 세계대전의 충격 뒤에도 잠시 지속되었다. 한편으로 대다수 미국인이 미국은 유럽문제에서 다시 발을 빼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 혁명 후 러시아는 우선 독자적인 권력주체로 자리를 잡는 것이 급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전적 의미의 주권을 패권적인 팽창을 통해 회복하려 했던 나치 '제3제국'의 시도는 결국 순식간에 옛유럽의 붕괴를 초래하고 말았다.

* 유럽의 손실 -   제2차 세계대전은 대략 5,200만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중 2,700만명이 소련인이었다. 소련인들이 전쟁에서 가장 큰 희생을 치뤄야 했다. 소련 다음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지역은 동유럽과 남동유럽이었다. 750만명을 헤아렸다. 그중 유대인이 400만명에 달했는데, 그것은 전체 인구의 약 9%에 해당한다. 그리고 독일인 희생자 수는 560만명으로 인구의 약 8%에 해당한다. 전쟁의 영향이 그보다 덜했던 여타 유럽 국가들은 총 400만명의 사망자를 기록했다. 결국 제1차 세계대전의 희생자 수와 비교하면 제2차 세계대전의 인명 손실은 5~6배가 되었다. 또한 유럽 대륙 안에서 5000만명이 임시적으로, 또는 영구히 실향민의 신세가 되었다. 영국과 중립국들을 제외한 유럽의 거의 모든 대도시가 파괴되었다. 특히 동유럽 지역이 피해가 심했다. 그곳에서는 소련군과 독일군 양측 모두 퇴각시에 '초토화' 작전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 유럽 국가의 정치 경제적 손실은 그동안 유럽인들이 식민화했던 민족들이 해방되는 과정을 촉진했다. 영국은 인도아대륙이 추축국 진영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으려고 전쟁중에 인도인들에게 전쟁이 끝나면 독립할 수 있다고 믿음을 주고자 애썼다. 1947년에 인도는 독립했다. 1948년에는 버마와 실론도 독립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이미 '본국'과의 종속관계가 점차 느슨해진 캐나다와 남아프리카 공화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같은 자치령들은 이제 완전히 독자 행보를 걸어갔다.  샤를 드골의 '자유 프랑스'위원회는 위임통치령인 시리아와 레바논의 독립을 약속했고, 그 외의 식민지에 대해서도 '개혁'을 보장해 줄 수 밖에 없었다. 1944년에 모로코와 튀니지공화국에서는 토착민들이 독립의 지위를 얻기 위해 운동을 전개했다. 알제리에서는 1945년에 유혈충돌이 일어났다. 인도차이나에서는 일본이 권력을 잃고 물러난 뒤, 베트남 독립동맹 운동이 프랑스 제국주의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인도네시아 민족 운동은 일본의 항복을 이용해 과거의 네덜란드 식민 지배에서 인도네시아가 독립한다고 선포했다. 

    프랑스는 분명히 영연방 모델을 따라 식민 권력의 지위를 재건하려고 했다. 영국에서도 최소한 급진 독립운동만큼은 막아보려는 움직임이 존재했다. 그러나 제국의 권력지위를 구해보려는 시도는 모두 식민지 지역에서 진저리 나는 무장투쟁만을 초래했을 뿐이다. 그 투쟁에서 유럽 식민 권력이 승리할 가능성은 적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두 승전국은(소련보다는 미국이 더 그랬지만) 유럽의 지배에서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있는 식민지가 해방되는 것을 돕고자 노력했기 때문이다. 식민 지배권을 유지하려는 집착은 프랑스나 네델란드 사람들이 바랐던 것 같이 해양제국의 잠재력을 통해 유럽 국가들을 다시 강화하는 대신에 오히려 유럽을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더 약화하는데 기여했을 뿐이다.

* 권력 이동 -    같은 전쟁을 경험했는데도 미국은 경제적으로나 권력정치의 전략상으로나 빠르게 상승했기에 유럽의 손실은 더욱 극적이었다. 미국은 채권국이자 전쟁 물자 공급국이라는 역할을 이용해 미국 상품을 위한 새로운 시장과 미국의 영향력이 미칠 새로운 영역의 확대라는 목표를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다. 1944년 여름에 브레튼우즈에서 국제통화기금을 창설할 때 미래의 회원국들은 원칙적으로 자국 통화의 자유로운 태환성을 수용해야 했다. 동시에 미국은 해군과 공군을 통해 세계의 지도적 군사 국가로 부상했다.                                                                                                                       그에 반해 유럽 국가들은 계속 힘을 잃어 갔다. 소련도 승전국으로서 전략적 이득을 많이 챙겼기 때문이다. 루스벨트는 소련이 독일에 요구한 배상(200억 달러어치의 생산설비를 해체해 그중 절반을 소련이 수송해 가는 것)에 원칙적으로 동의했다. 반면에 트루먼은 배상을 그 정도로 많이 하면 유럽경제가 붕괴하고 말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래서 포츠담에서 승전국들은 일단 각기 자신의 점령지에서 물자를 빼가는 것으로만 배상요구를 충족시키자고 결의했다.  소련에는 서구 열강의 점령지에서 해체된 설비중에서 10%를 따로 더 제공하기로 했다.

    미국과 소련 양국 모두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점령국으로서 중부 유럽 지역의 통제권을 거의 장악했고, 자국의 안보를 위해 그것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형식상으로는 미국, 소련과 마찬가지로 승전국의 일원으로서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함께 점령하고 있던 두 유럽 열강, 즉 영국과 프랑스는 결코 미국과 소련의 동급이 아니었다.                                                         영국은 1940년에서 1941년까지 1년 이상 독일 세계제국의 위성국으로 전락하지 않으려고 홀로 필사적으로 투쟁했으나, 경제력의 약화로 인해 외교 경험에서 가진 우위가 이제 아무 의미가 없어졌으며 미국의 지도력에 의지하는 것이 불가피함을 확인해야 했다. 영국의 정치가들은 한편으로 소련에 대항하는 축인 미국을 계속 유럽 대륙에 개입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 소련의 세력권으로 빠져들지 않은 유럽의 소국들을 미국이 주장하려고 하는 패권에 대항하는 축으로 만듦으로써 가능한 운신의 폭을 더 넓히려 애를 썼다. 물론 고전적인 의미에서 강대국의 자율성은 더는 그런 균형 유지 행위를 통해 되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제 영국의 국제정치는 유럽의 새 권력관계가 안정되는데만 영향을 끼쳤을 뿐이다.     프랑스는 1940년 6월에 장군들이 저지른 전술 오류와 군 내부의 전의 상실로 인해 독일의 공격에 패배한 후 다시는 독자적으로 강대국이 될 수 없었다. 레지스탕스와 '자유 프랑스' 군대의 덕으로 프랑스는 애초에 루스벨트 대통령이 염두에 두었던, 영미 해방군의 점령 통치를 겪지 않아도 되었다. 또한 레지스탕스와 '자유 프랑스' 군대는 새로 국민의 합의를 이끌어냄으로써 1930년대의 자멸 행위 이후 다시금 프랑스가 독자 행위 능력을 지닌 주체로 국제 무대에 등장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렇지만 해방 그 자체를 놓고 보면 프랑스 전사들은 크게 이바지 하지 못했다.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프랑스는 독일에 점령당한 후 수년동안 수탈을 당한 후인지라 미국의 원조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 선택의 여지들 -    미국과 소련은 유럽 대륙이 빨리 안정되기를 바랐다. 미국은 전후 유럽이 능력 있는 교역 당사자이자 수익 시장(판로)이 되지 못하면, 자국이 심각한 과잉생산 위기에 빠지지 않을지 우려했다. 소련은 허약해진 유럽의 국가들이 미국의 헤게모니에 종속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기를 원했다. 그렇기에 미국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차관과 구호품을 지원해 유럽인들이 처한 경제적 곤경을 덜고자 했다. 소련은 각국 공산당을 통해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한에서는 유럽 주민들을 상대로 소비를 포기하고 시급히 재건에 나서도록 독려했다. 

    미국과 소련의 지도자들은 모두 전쟁 재발을 원하지 않았다. 먼저 미국 지도부가 전쟁을 원치 않은 이유는 비용과 고통을 빼더라도 이제 막 끝낸 그 전쟁에 자국민을 끌어들이려면 엄청나게 노력해야 했다는 점이었다. 종전 시 공적 삶의 영역을 전체적으로 지배하던 것은 동원 해제 요구였기 때문이다. 반면에 소련 지도자들이 전쟁을 원치 않은 이유는 지난 전쟁 당시 소련 정권이 무너질 뻔한 상황에서 가까스로 벗어났으며 전쟁 전의 상황을 재건하기 위해서만도 수년동안의 복구작업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기술의 진보로 인해 대규모 전쟁의 비용과 파괴력도 증가했기에 그것을 피하고자 했던 것처럼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점차 알게 되었듯이, 전쟁이 발발하면 원자폭탄과 같은 위험한 무기가 투입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미국과 소련은 경제체제와 정치 질서가 서로 달랐지만, 애초에 구체적인 경제 이익의 여러 차원에서는 상호보완적이었다. 미국은 전쟁 수요에 의한 생산 확대가 끝난 뒤 실업 증가와 경기 후퇴를 초래할 과잉생산을 피하기 위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만 했다. 반면에 소련은 전쟁으로 인한 파괴의 결과를 극복하고 전후 주민들의 기대를 소비 상승으로 충족해 주기 위해 더 많은 공업제품을 공급할 필요가 있었다. 먼저 미국이 소련에 필요한 차관을 제공하면, 소련은 미국 상품을 구매해 수입 욕구를 채울 수 있었다. 그것과 관련한 소련 시장의 개방은 세계 전역에 다자 무역 체제를 확립하려는 미국의 관심과 맞아떨어졌다. 대미 무역수지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소련은 미개발 원자재를 미국 산업에 개방할 수 있었다. 바로 그 자유주의적 상업 세계로 인해 미국 지도부는 소련과 계속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고, 소련의 테크노크라트들 또한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했다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었다. 

    미국은 정치 상황으로 보든 경제 체제로 보든 미국의 이념상과 조응하지 않는 파트너들과도 경제 팽창이라는 이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협력할 수 있었다. 소련의 안보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곳인 동유럽이 미국에는 권력정치의 전략으로 보나 경제적으로 보나 어떤 특별한 의미도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동유럽을 상대로 미국의 수출은 전체 중 2% 정도였고, 수입은 3.5%, 해외투자는 5.5%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루즈벨트 대통령은 소련이 동유럽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옹호했고, 소련이 전쟁의 폐허로부터 재건할 때 차관을 통해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 마셜플랜 -    유럽대륙이 장기 분열로 전환하게 된 계기는 1947년 초에 미국정부가 서독을 포함한 서유럽의 안정화 정책을 강화하겠다고 결정한 것이었다.  서유럽을 안정화하려는 노력은 트루먼행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필수적이었다. 이제까지 유럽국가들에 제공된 원조가 너무 적다는 것이 확인됨에 따라, 유럽인들이 보호주의로 되돌아갈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 의회는 유럽을 위한 새로운 채권 발행을 허용하지 않으려 했고, 프랑스 정부도 유럽 경제의 안정적 회복에 불가피한 서독 산업을 빠르게 재건하는데 동의하지 않았다. 트루먼 행정부는 소련의 위협을 의식적으로 과장해서 알림으로써 의회의 저항을 극복했다. 1947년 3월 12일에 그리스와 터키를 원조하기 위한 기금을 요청하고자 대통령이 의회에서 발표했던 '트루먼 독트린'은 소련과 미국의  갈등을 이제 '테러와 압제' 대 '자유' 체제의 세계적 투쟁으로 규정했다. 트루먼은 세계 도처에서 이 자유를 지키는 것이 미국의 사명이라고 밝혔다. 이제 국무부 정책기획관이 된 캐넌과 국무장관 조지 C. 마셜은 유럽 각국을 위한 개별 원조계획을 하나의 다자적 재건프로그램으로 포괄함으로써 프랑스의 저항을 극복했다. 그것은 동시에 프로그램 참여국의 통합을 위한 길을 열어주었다. 1947년 6월 5일에 국무부 장관이 프로그램을 설명한 뒤 그것은 '마셜플랜'으로 알려졌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세력이 강한 서유럽국가에서 마셜플랜을 관철하기 위해 동유럽국가들과 소련에도 참여가 제안되었다. 그리하여 이미 시작된 유럽분열을 다시 돌릴 기회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