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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무, 다산 정약용 평전

-    다산이 태어난 마을인 마재(馬峴)는 당시 행정상의 명칭으로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馬峴里)였다. 현재 행정구역 명칭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현 마을이다. 현(峴 재갈 현)이라는 글자의 뜻이 '재'이기 때문에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보통 마현을 '마재'라고 부른다. 다산은 한강의 옛이름이 열수라고 믿었기에 열수의 상류라는 의미로 자신의 마을을 '열상'으로 표기했다. 나열한 호칭 이외에도 마을을 부르는 이름은 참 많았다. 마을 곁의 산자락이 두척(斗尺)이고 호수 같은 강이 두호(斗湖)여서 능내와 합해진 이름이 두릉이니, 외부에서는 두릉(斗陵)으로 쓰기도 했다. 세상에 널리 알져진 이 마을의 유래는, 춘천쪽에서 흘러오는 북한강과 충주쪽에서 흘러오는 남한강이 합해지는 양수리(兩水里, 두물머리) 일대의 풍광은 매우 아름답다. 예전에는 광주군의 지역이었지만 지금은 남양주시의 지역이다. 다산의 말대로 수향(水鄕, 물 마을)인 소내는 풍수지리설에도 빼놓지 않고 거론하는 명당마을이다. 

-    다산의 5대조인 정시윤은 인조 말엽에 태어나 숙종 말엽까지 생존했던 인물이다. 숙종 시대는 당쟁이 격화되던 때인데, 백성들을 위하다가 임금의 뜻에 거슬려 벼슬을 버리고 노후를 보낼 땅을 찾던 중, 소내를 점지했다고 한다. 정시윤은 세 아들이 있었는데, 동쪽에는 큰아들이, 서쪽에는 둘째아들이 살고 막내아들에게는 마을 뒷산인 유산(酉山) 아래에 조그만 집을 지어서 살게 했는데, 그때 서자가 살던 집이 다산이 살았던 집으로 오늘의 다산 유적지의 일대가 되었다. 

-    경기도 광주의 소내라는 마을은 다산의 아버지 삼형제가 목마 타고 뛰놀던 곳이자 다산 오형제가 대를 이어 꿈과 희망을 키웠던 마을이며 또한 다산 큰형수의 남동생인 '이벽'이 누나 집을 찾아오느라 발걸음이 잦았던 곳이요, 다산의 자형 이승훈이 처갓집을 자주 찾았던 곳이며, 다산 큰형의 사위이자 다산의 조카사위였던 황사영이 처갓집으로 찾아오던 곳이었다. 소내는 이렇게 천주교 초창기의 거물들이 모여들던 곳이요, 거기서 태어나고 자란 희대의 신앙인 다산의 손위 형 정약종이 초기 천주교 명도회장(明道會長)으로 열렬히 활동하던 곳이며, 다산의 장형인 정약현과는 친사돈 간인 순교자 홍낙민이 사돈집을 찾아오던 곳이었다. 

-    모계의 가계를 보면 어머니 윤씨 부인은 해남 윤씨 사람으로 고산 윤선도의 후손이자 공재 윤두서의 손녀였다. 다산의 어머니는 다산이 아홉살 때이던 1770년 11월 9일 세상을 뜨고 말았다. 비록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으나 어린 다산을 돌봐 줄 어진 부인 큰형수가 있었다. 다산의 어머니 윤씨 부인은 다산의 아버지에게는 재취부인이었다. 초취 부인 위령 남씨가 큰아들 정약현을 낳고 일찍 세상을 뜨자, 두 번째로 장가들어 맞은 아내가 바로 다산 어머니였다. 형수 이씨는 정약현의 부인으로 실제로는 다산의 이복형의 아내이자 이복 형수였다. 그래서 계모를 모셔야 했던 며느리였고, 또 그 계모가 세상을 먼저 떠나 홀아비인 시아버지를 모셔야 했고, 어머니 없는 시동생 네 명을 보살펴야 했으니 얼마나 힘든 시집 생활이었겠는가. 그럼에도 어느 것 하나 유감없이 잘 처리했다니 얼마나 훌륭한 여인이었는가. 그분의 친정 아우가 바로 이벽이었고, 사위가 황사영이었다. 

-    한편 다산 아버지 정재원의 삶도 기구했다. 첫째 부인 의령 남씨와 사별하고, 재취 부인 해남 윤씨와 재혼하여 1녀 3남을 낳고는 1770년 윤씨와 또 사별했다. 1771년 처녀 황씨를 맞아다가 측실로 삼았으나 오래지 않아 요절했고, 1773년 서울에 사는 처녀 김씨를 맞아 측실로 삼았으니 그녀 나이 겨우 20세였다. 이 서모가 바로 다산의 형수를 이어 다산의 어린 시절을 돌봐 준 분이다. 9세에서 10세 전후에 형수가 돌봐 주었다면, 12세에서 결혼한 15세 전후까지는 서모가 돌봐 준 것이다. 12세의 다산을 20세의 서모가 정성스럽게 보살펴 주었다. 다산이 귀양지에서 돌아왔을 때는 서모가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지 5년째였다. 

-    다산은 15세의 성년이 되자 장가를 든다. 광주군의 한강변 마재 시골 청년이 서울의 한 복판인 회현동 풍산 홍씨 가문의 규수에게 장가를 든다. 1776년 2월 15일 관례를 치르고, 16일 상경하여 복사꽃이 활짝 핀 2월 22일 혼례를 올리고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부인 홍씨는 시집 올 때 다산보다 한 살 위인 16세였다. 한적한 시골에서 한가롭게 학문 연마에 여념이 없던 시골 소년의 서울 생활은 모든 면에서 큰 변화를 일으켜 주었다. 그때 서울에는 20대 초반의 패기만만한 젊은 선비들인 이승훈과 이벽등이 남인계 소장 학자들로 이름을 펄펄 날리고 있었다. 더구나 세상이 바뀌고 정권이 바뀐 해였다. 여든이 넘어서까지 52년 동안이나 지루하게 집권한 영조가 세상을 떠나고 25세의 젊은 정조가 왕위에 등극하여 뭔가 변화가 예견되고, 남인에게도 볕이 들리라는 일루의 희망이 있던 때였다.

-    1784년 4월 14일, 이벽은 네번 째 맞는 누님의 제사를 지낸다는 명목으로 다산의 집인 마재에 찾아갔다. 제사를 마치고 4월 15일 마재에서 서울로 배를 타고 오는데, 지금의 팔당댐 부근인 두미협(斗尾峽)이라는 협곡을 지나오는 배 안에서 약전, 약용 형제는 이벽이 보여주는 천주교 관계 서적을 최초로 읽어 본다.  "갑진년 4월 15일 큰 형수의 제사을 지내고 우리 형제와 이벽이 함께 배를 타고 물결을 따라 천천히 내려오는 배 안에서 천지조화의 시초, 사람과 신, 삶과 죽음의 이치를 듣고 황홀함과 놀라움과 의아심을 이기지 못했는데, 마치 '장자'에 나오는 하늘의 강이 멀고 멀어 끝이 없다는 것과 비슷했다. 서울에 온 뒤로 이벽을 따라다니며 <실의>와 <칠극> 등 여러권의 책을 읽고 흔연하게 그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는 제사를 지내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없었으며, 신해년 겨울(1791년) 이후로 나라에서 금하는 일이 더욱 엄중해지자 입장의 차이가 마침내 구별되었다."

-    1887년 다산은 자신의 고향마을에서 가까운 양근군에 농장을 마련했다. 양근의 포구 문암포에서 동쪽으로 10리쯤 들어간 곳인데 '문암장(門巖莊)이라는 이름의 향장(시골의 농장)을 매입했다.  다산의 시중에서 "장인 어른 일찍이 산 살 돈을 주었네."라는 구절을 보면 장인 홍화보가 식량 걱정은 하지 말라는 뜻으로 전답 2경(약 80두락)을 구입해 주었다는 것이다. 다산은 고향에만 가면 강 건너 양근의 농장에 자주 들렀고, 해배 뒤에도 친구들과 그곳을 찾아가 놀며 시를 지었던 일도 확인할 수 있다. 넉넉하고 유족한 풍산 홍씨 집안으로 장가들어 장인어른이 다산의 고향 마을과 가까운 양근(揚根 - 지금의 양평) 문암(門巖 - 지금의 문호리)에 상당한 농토를 장만해 준 덕에 일생동안 빈곤을 피할 수 있었다.

-  1791년 신해옥사 - 진산사건, 신해옥사 ; 전라도 진산현(지금의 충남 금산군 진산면)에서 열렬한 천주교 신자 윤지충과 그의 외종 권상연이 윤지충의 모친상을 당했는데,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지내지 않은 사건. 본격적인 천주교 탄압의 첫 번째 사건이다. 그런데 윤지충은 다산의 외종형으로 윤선도 가문의 후손으로 일찍 진사과에 합격하여 세상에 이름을 날린 사람인데 천주교 순교자가 되었다. 그동안 천주교 내부에서만 제사문제로 갑론을박하다가 마침내 중국의 천주교 교구로부터 제사를 지내면 천주교 신자라 할 수 없다는 교회법이 하달되어 첫 번째로 실행한 신자가 윤지충, 권상연이었다.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순교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유교 국가인 조선의 예법과 전통을 따르기 위해 천주교를 버려야 할 것인가, 진정한 고민이 일어나게 되었다. 정약종을 제외한 정약전, 정약용은 전통적 조선 예법에 따르고자 단호히 천주교와 손을 끊었지만 그러지 못한 사람이 많아 이른바 '천주교 박해'라는 비극의 역사와 문명의 충돌이 극대화되고 있었다. 그때부터 국가에서는 본격적으로 천주교를 사교로 매도하고 엄하게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로부터 1801년 신유옥사에 이르기까지 10년간 공서파는 다산을 비롯한 진보적 지식인 집단인 '신서파'를 공격할 빌미를 찾으면서 많은 유언비어를 날조해 내고 있었다. 신서파는 계속 수세에 몰리는 국면이었으니 다산의 벼슬살이 10년은 천주교 문제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채 반대파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

-  금정찰방 -   1795년 7월 26일 충청도 홍주목의 금정역(역참, 서신, 봉화를 책임지는 벼슬-홍성 서산 일대의 내포 지역)으로 좌천 됨. 정3품 당상관에서 정6품으로 강등.

-  도산사숙록 - 도산(퇴계 이황) 私淑(직접 스승을 모시고 배우는 공부가 아니라 옛 어른을 사모하여 마음속의 스승으로 모시고 저서를 통해 그분에 대한 공부를 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                                                                                             잠시도 그냥 있지를 못하고 무엇인가를 행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다산에게 언제나 정적이면서 敬(공경할 경, 삼가할 경)을 앞세운 퇴계의 깊은 사상을 진지한 마음으로 접하자, 거기에도 무한한 진리가 살아서 움직이고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나 보다.   <저는 요즘 퇴계 선생의 문집을 얻어 읽으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근차근 실마리를 찾듯 분석해 봅니다. 그 깊은 의미와 넓은 범위는 진실로 후생 末流로서는 감히 엿보거나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이상스럽게도 정신이나 기운이 편안해지고 뜻이나 생각이 가라앉아 血肉과 근맥이 모두 안정됩니다. 안도감이 들면서 예전의 조폭스럽고 발월하던 기운이 점점 사라지니 이 한 부의 책이 저 같은 사람의 병증에 맞는 약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계수에게 답함(편지)-

-  <잠심완미>   潛心玩味. 옛날 정자나 주자같은 학자들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글의 의미를 깊이 음미한다'라는 뜻.  다산은 책과 공부를 통해서 느끼는 바가 진짜 맛이나 재미이지, 팔진미, 오후청의 음식 맛이 맛있는 것이 아니며 고관대작의 지위가 재미를 느끼게 하는 것도 아니라는 결론을 얻는다.

-  <다산의 병통>   "나는 평소에 병통이 있다. 무릇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글로 짓지 않을 수 없고, 지은 글이 있으면 남에게 보이지 않을 수 없다. 요즈음 와서 점검해 보니 모두가 가볍고(輕) 얕은(淺) 짓이라는 두 글자 때문이다."

- <  만 가지 움직임이 조용함만 못하고  / 萬動不如還一靜                                                                                                       뭇 향기 따르느니 외로운 향기 지켜야해        /  衆香爭以守孤芳>

- <죽란시사>   竹欄詩社. 죽란시 동인 - 모임의 규약                                                                                                                  "살구꽃이 피면 한 번 모이고, 복숭아 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이고, 한여름에 참외가 익으면 한 번 모이고, 초가을 서늘할 때 서쪽 연못에서 연꽃 구경을 위해 한 번 모이고, 국화가 피면 한 번 모이고, 겨울철 큰 눈이 내리면 한 번 모이고, 세모에 화분의 매화가 피면 한 번 모이는데, 모일 때마다 술과 안주, 붓과 벼루 등을 준비하여 술을 마시며 시를 읊는데 불편이 없도록 한다. 모임은 나이 어린 사람부터 시작하여 나이 많은 사람에 이르고, 한 차례 돌면 다시 이어간다.  (중략) 이에 이름과 규약을 적고 제목을 '죽란시사첩'이라 했는데 '죽란'이 있는 우리 집에서 열리는 경우가 많아서이다."

-  <菊影詩序>   촛불을 밝혀 벽에 비치는 국화의 그림자를 구경.                                                                                          여러 꽃 중에서도 국화는 특별히 네 가지 특징이 있다. 늦게 피는 점이 하나이고, 오래도록 견디는 것이 하나이고, 향기로운 것이 하나이고, 고우면서 화려하지 않고, 깨끗하면서 싸늘하지 않은 것이 하나이다. 세상에서 국화 사랑하기로 이름나고 국화에 대한 취미를 안다고 자랑하는 사람도 이 네 가지를 좋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 네 가지 이외에 특별히 촛불 앞의 국화 그림자 하나를 더 추가했다. 밤이면 구경하려고 담장 벽을 쓸고 등잔불을 켜고는 외롭게 그 가운데 앉아서 혼자 즐겼다.                                                                                                                                                                                    국화의 위치를 정돈하여 벽에서 약간 떨어지게 한 다음, 비추기 적당한 곳에다 촛불을 밝히게 했다. 그랬더니 기이한 무늬, 이상한 형태가 갑자기 벽에 가득했다. 그 가운데 가까운 것은 꽃과 잎이 서로 어울리고, 가지와 곁가지가 정연하여 마치 묵화를 펼쳐 놓은 것 같고, 그 다음것은 너울너울하고 어른어른하며 춤을 추듯이 하늘거려서 마치 달이 동녁에 떠오를 때에 뜨락의 나뭇가지가 서쪽 담장에 걸리는 것과 같았다. 그 가운데 멀리 있는 것은 산만하고 흐릿하여 마치 가늘고 옅은 구름이나 노을과 같고, 사라져 없어지거나 소용돌이 치는 것은 마치 질펀하게 요동치는 파도와 같아, 번쩍번쩍 서로 엇비슷해서 어떻게 형용할 수가 없었다.

-  <不亦快哉> 불역쾌재. <이 또한 통쾌하지 아니한가>

- <초서독서법>  抄書(베낄 초, 글 서 - 책에서 중요한 내용을 골라 뽑아 기록해 두는 일)                                                        초서독서법(抄書讀書法) ; 글을 읽으며 공부하는데 그치지 않고, 중요한 것을 뽑아 글로 쓰면서 공부하는 방식. -- <무릇 한 권의 책을 얻더라도 내 학문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뽑아 기록해 모으고, 그렇지 않은 것은 눈길도 주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비록 백 권의 책이라도 열흘 공부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다산-                                                                               "책을 읽으며 함께 받아 쓰면, 종이가 아니라 몸에 책이 새겨진다."

- <정조/체제공의 죽음>    1799년 음력 1월 29일,  38세의 다산이 곡산 고을을 다스릴 때 체제공이 세상을 뜨고 말았다. 아무리 성난 파도 같은 반대파의 모함에도 우뚝 선 강물 속의 지주로 버티며 다산을 막아주었던 체제공이었다. 체제공은 사도 세자를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읍소하여 영조가 감복할 정도의 충심이 있었고, 후에 영조가 왕세손인 정조에게 "체제공은 진실로 나의 사심없는 신하이고 너에게는 충성스러운 신하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1800년 39세의 다산은 초봄부터 낙향할 뜻을 굳히고 서울과 소내를 오가며, 또 죽란사에 모여 시우들과 시를 지으며 보내던 여름, 뜻밖에 정조대왕의 붕어소식을 듣는다. 6월 28일 유시에 운명하였으니 헤질 무렵의 시각이었다. 다산보다 10살 위이던 정조가 겨우 49세라는 아까운 나이로, 그렇게 쉽게 떠나리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참으로 뜻밖의 불행이었다. 

- <여유당>   與猶堂(더불 여, 오히려 유, 집 당). '여유'라는 말은 <노자>에 나오는 글귀로 "망설임이여(與), 겨울 내를 건너는 것이로다! 주저함이여(猶),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함이로다!"라는 의미를 취한 것이다. "겨울에 냇물을 건너는 것은 차갑다 못해 따끔따끔 뼈를 끊는 듯하니, 어쩔수 없는 경우가 아니고는 하지 않을 일이다.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함은 지켜보는 것이 몸에 가까우니 어쩔 수 없는 경우라도 하지 않는 법이다." 참으로 신중하게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삶에 대한 경고의 뜻이 담긴, 인고와 인내만이 겨우 목숨이라도 부지하게 해 줄 각박한 삶을 예견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  <風雨敎爭二百年>   비바람 섞어 치듯 싸운 지 이백년. - 선조 8년 동서 분당으로 당쟁이 시작된 지 200년, 동인은 남북으로 서인은 노론, 소론으로 갈리어 4색이 싸우다가, 끝내는 노론이 시파 벽파로 갈려 살육 작전이 계속되고 있으니 도대체 이런 나라를 어찌해야 할 것인가?   겨자씨만큼의 잘못을 저질러도 끝내 죽이고 말던 시파와 벽파의 싸움에서 처참하게 패한 자신은 정치적 싸움의 희생물임을 냉철히 꿰뚫어 보았다.. 지위 높은 정승, 판서 등인 벽파들은 위에서 조종하고 그들에게 빌붙은 지위 낮은 공서파는 화살촉을 간다는 비유에서 신유옥사의 본질이 드러난다. 

- <당쟁의 원인>    다산이 가장 숭배하던 학자는 성호 이익이었다. 성호 이익은 당파 싸움이 일어나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벼슬자리는 적은데 벼슬을 하려는 사람이 많은데 있다고 했다. 이는 곧 재화는 부족한데 먹을 사람은 많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당쟁은 바로 먹이 다툼이라는 뜻이다. 해결책은 무엇일까? 결국 먹이를 많게 하는 國富의 증진뿐이다.

-<해남 귀양살이>   인간은 망각의 동물인가. 억울함과 분노, 답답함과 불편함, 터질듯 가슴 막히는 서러움도 잊게 되니 세월은 모든 것을 삭이게 해 주는 약인가. 누구를 탓하면 무엇하고 누구를 원망하면 무엇하랴. 선비란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남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할 수 밖에 다른 어떤 일이 있겠는가. 누구 하나 가까이 오는 사람도 없이 고독하던 시절. 주막집 노파가 겨우 말을 걸어 주고 읍내의 신분이 높지 않던 아전 자제들이 다산에게 글을 배우려고 찾아오기 시작했다. "누구 한 사람 편안하게 우거하기를 허락하지 않던 때를 당해서 좌우에 있으며 가장 측근이 되어 주었던 사람은 손병조, 황상 등 네 사람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말한다면 읍내 사람들은 바로 근심과 걱정을 함께 견뎌 냈던 사람들이었다."

- <사의재>   四(네가지) 宜(마땅할 의) 齋(재계할 재). 강진 주막집 노파의 토담집 공부방을 '사의재'라 명명하여 학문의 요람으로 여겼다.                                                                                                                                                                         <사의재란 내가 강진에서 귀양 살며 거처하던 방이다. 생각은 마땅히 맑아야 하니 맑지 못하면 곧바로 맑게 해야 한다. 용모는 마땅히 엄숙해야 하니 엄숙하지 못하면 곧바로 엄숙함이 엉기도록 해야 한다. 언어는 마땅히 과묵해야 하니 말이 많다면 곧바로 그치게 해야 한다. 동작은 마땅히 후중해야 하니 후중하지 못하면 곧바로 더디게 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그 방의 이름을 '네 가지를 마땅히 해야 할 방(四宜之齋)'이라고 했다. 마땅함이라는 것은 義(옳을 의)에 맞도록 하는 것이니 의로 규제함이다. 나이 들어가는 것이 염려되고 뜻을 둔 사업이 퇴폐됨을 서글프게 여기므로 자신을 성찰하려는 까닭에서 지은 이름이다. 때는 가경 8년(1803년) 11월 신축일(10일) 동짓날이니 갑자년(1804년)이 시작되는 날이다. 이날 주역의 건괘를 읽었다.>

-  <독서를 하려면>    독서를 하려면 먼저 근본을 확립해야 한다. 근본이란 무엇을 일컫는가. 학문에 뜻을 두지 않으면 독서를 할 수 없으며, 학문에 뜻을 둔다고 했을 때는 반드시 먼저 근본을 확립해야 한다. 근본이란 무엇을 일컫는가. 오직 효제(孝悌)가 그것이다. 먼저 효제를 힘써 실천함으로써 근본을 확립해야 하니, 근본이 확립되고 나면 학문은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넉넉해진다. 학문이 몸에 배어들고 넉넉해지면 특별히 순서에 따른 독서의 단계를 강구하지 않아도 괜찮다.   효제의 실천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이 편지의 내용은 바로 다산의 학문 전체를 꿰뚫는 근간이요 핵심사항이다. 인간의 기본적인 윤리인 효제를 제대로 실천할 수 있는 기반이 닦이면 나머지는 순서도 단계도 필요 없다는 주장이 다산 실천 철학의 중심이다. 가장 기본적인 윤리조차 실행하지 않으면서 독서를 하면 무엇하며, 철학과 학문을 연구하면 무슨 결과가 나오겠느냐는 반문에서 다산의 실천 사상이 튼튼하게 자리를 잡게 된다. 다산은 뒤에 '인(仁)'이 바로 효제라고 과감하게 주장하면서, '이(理, 다스릴 이)'를 말하는 사람들의 실천을 떠난 논리에 거대한 반기를 들게 된다.

- <혜장선사와 만남>   1804년 4월 18일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있는 萬德寺이자 백련사라는 절을 구경하다, 아주 젊고 멋진 승려 혜장선사와의 조우가 이루어진다. 자는 무진(無盡). 해남 출신인 그는 다산보다 10년 아래인 34세이다. 다산은 혜장의 도움으로 비좁은 토담집의 주막에서 벗어나 고요하고 깨끗한 절간의 생활도 가능해졌다. 해남 대흥사의 승려였던 혜장 덕에 뒤에는 초의(艸衣) 의순이라는 큰 학승이 들어와 유불의 문화와 차(茶)의 경지가 더 넓어지고, 추가 김정희에게 까지 연결된다. 다산에게서 차의 이론을 배운 초의가 차 문화 발달에 큰 영향을 미쳐 다성(茶聖)의 호칭까지 들었음은 역시 다산이라는 학자이자 차 이론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  <김이재>    1789년 다산은 28살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했다. 이때 동방이자 뒤에 정승에 오른 안동 김씨 김이재가 있었다. 그는 179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다산과 같은 시기에 벼슬하며 가깝게 지냈다. 김이재의 김씨 집안은 노론의 대가였지만 시파로 정조의 신임을 받아 승승장구로 잘나가던 처지였다. 1800년 정조가 붕어하자 이들은 벽파의 공격을 받았다. 그래서 김이재는 다산이 강진으로 귀양오기 전에 강진에서 바다 하나 사이인 완도군 고금도에 귀양 와 있었다. (후에 해배되어 서울로 올라간 김이재가 변호를 해 주어 다산의 귀양살이가 풀려나게 되었다.) 교리 신분으로 귀양왔던 김이재였기에 강진 현감 정도가 함부로 할 처지가 아니었던 그는 관속들에게 당부해 다산을 너무 혹독하게 다루지 말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그는 1805년 마침내 귀양이 풀려 서울로 귀경하면서 가는 길에 강진 읍내에서 귀양 살던 친구 다산을 만나보고 떠났다. 이때 다산이 김이재를 떠나보내면서 읊었던 이별시가 바로 <송별>이다.    <역사(驛舍)에 가을비 내리는데 이별하기 더디구나 / 이 머나먼 외딴 곳에서 아껴 줄 이 다시 또 누구랴 / ...>

- <다산초당>    1807년 초여름, 마흔여섯 살의 다산은 백련사 또는 만덕사라고 부르는 절을 출입하기 시작했다. 강진읍에서는 20리가 조금 넘어 그렇게 멀지 않은 거리였다. 바로 이 절에서 능선 하나만 넘으면 다산(茶山)이라는 작고 낮은 산이 있다. 이 산 밑에는 귤동이라는 마을이 있다. 귤동은 해남 윤씨들의 집성촌인데 다산에는 해남 윤씨 일족들이 세운 다산초당(茶山艸堂)이라는 조그만 정자가 있었다. 윤씨 마을의 대표적인 선비인 윤단이 초당에 많은 장서를 비치해 두고 독서하며 손자들을 가르치며 한가한 세월을 보내던 곳이 바로 다산초당이었다. 윤단의 아들 귤원 윤규노와 윤규하는 형제였다. 이들 세 부자가 중심이 되어 다산을 그곳 초당으로 초빙하여 자제들을 가르치자는 발상을 했다. 마흔일곱이던 1808년 봄 3월 16일부터 다산서옥에서 지었다는 시가 시집에 실린 것을 보면, 다산이 초당을 서옥으로 여기며 애정을 갖기 시작했음을 알게 된다. 이로부터 다산초당은 '다산학'의 산실이 된다.                                                                                                       다산이 옮겨오면서 초당은 그대로 두고 동암, 서암을 새로 지어 다산은 동암에서 거처하고 제자들은 서암에서 기숙하면서 글을 배웠다. 다산은 비록 산속의 정자지만, 자신의 집으로 여기며 정원을 새롭게 단장하고 경관을 아름답게 꾸몄다. 연못을 파서 물고기를 기르고 물줄기를 끌어다가 인공 폭포를 만들었으며, 흐르는 물을 이용하여 제전(梯田, 사다리 밭)을 일궈 미나리를 심어 팔아서 용돈도 쓰고 먹기도 했다고 한다.                                                                                                             다산은 강진 읍내에서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처음에는 초당에서 꽤 거리가 있는 마을까지 다니면서 식사를 했다. 초당은 식사를 준비할 여건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평소에 다산의 학문과 인품에 감복했던 백련사의 중 한 사람이 그런 불편을 알아차리고는 자신이 세 때의 식사를 마련해 주겠다고 했다. 그는 초당 곁에 움막을 지어 부엌을 차려 놓고 다산의 식사를 대접했다고 한다.   초당에서의 삶은 그런대로 불편이 없었다. 제자들이 찾아와 학단을 이루고 학문에 힘썼으며 생활도 학생들이 해결해 주었다.

- <조선의 3대 폐단>    충청도 양반, 평안도 기생, 전라도 아전 - 황현의 '매천야록'

- <정약용의 호 다산>  다산(茶山)이라는 산에 있는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정약용은 이름보다는 '茶山'이라는 호로 더 많이 불리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號(부르짖을 호)는 사는 곳의 지명을 빌려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본디 다산의 호는 '俟菴(俟, 기다릴 사. 菴, 책력 암)'이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다산'이 크게 알려져 200년이 지난 오늘에는 다산으로 대표되기에 이르렀다.

- <家戒>    <사대부의 마음가짐이란 마땅히 광풍제월(光風霽月)과 같이 털끝만큼도 가린 곳이 없어야 한다. 무릇 하늘이나 사람에게 부끄러운 짓을 아예 저지르지 않는다면 자연히 마음이 넓어지고 몸이 안정되어 호연지기가 저절로 우러나올 것이다. 만약 포목 몇 자 동전 몇 닢 정도의 사소한 것에 잠깐이라도 양심을 저버린 일이 있다면 이것이 氣象을 쭈그러들게 하여 정신적으로 위축을 받게 되니, 너희는 정말로 주의하여라.>

-    <소견이 좁은 사람은, 오늘 당장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으면 의욕을 잃고 눈물을 질질 짜다가도 다음 날 일이 뜻대로 되면 벙글거리고 낯빛을 편다. 근심하고 유쾌해하며 슬퍼하고 즐거워하며 느끼고 성내며 사랑하고 미워하는 모든 정이 아침저녁으로 변하는데, 달관한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비웃지 않을 수 없다. … 요컨대 아침에 햇볕을 환하게 받는 위치는 저녁때 그늘이 빨리 오고, 일찍 피는 꽃은 빨리 시드는 법이어서 바람이 거세게 불면 한 순간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한때의 재해를 당했다 하여 청운의 뜻을 꺾어서는 안 된다. 사나이는 가슴속에 항상 가을 매가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듯한 기상을 품고서 천지를 조그마하게 보고, 우주도 가볍게 손으로 요리할 수 있다는 생각을 지녀야 옳다.>

-  <仁>    공자의 중심사상은 논어에 있고, 논어의 중심 사상은 仁이다. 주자는 인이란 "사랑의 이치, 마음의 덕(愛之理, 心之德)"이라 해석하여 인이 이치(理, 다스릴 리)임을 설명하고 정자의 성즉리(性卽理)라는 학설과 합해서 인, 의, 예, 지가 모두 '마음 속에 있는 이치(在心之理)'라고 주장했다. 다산은 "효제(孝悌)란 인(仁)이다"라는 대전제를 내걸고 행위의 개념인 '효제'는 분할해서 이르는 말이고, 仁이란 총괄해서 일컫는 말이라고 했다. 즉 인이 '이치'가 아니라 행위인 효제라고 주장하며, 글자의 모양대로 사람(人)이 둘(二)인 것이 仁이니, 곧 두 사람(父子, 夫婦, 兄弟, 朋友, 君臣) 사이에서 상대방에게 최선을 다하여 섬겨 줌이 인이라고 말했다

- <대학>    정치철학서인 大學. 대학의 원론과 논리로 '백성에게 이로움을 주지 않는 정치는 백성들이 반기를 들고 일어나 망할 수 밖에 없다'고 경고하며 백성을 위한 정치를 주문한 책.              <일반백성의 욕심은 富(부자 부)와 貴(귀할 귀)다. 군자가 조정에 있을 때는 귀를 바라서이고, 소인이 野에 있을 때에는 부를 바라서이다. 따라서 인재 등용하는 일이 공정치 못하고, 어진 이를 어진 이로 모시지 않고, 친한 사람을 친하게 여기지 않으면 군자는 떠나가고, 재산 모으는 일이 절제가 없게 되며 즐거움을 즐거움으로 해 주지 않으면 소인은 반기를 들어 나라가 망해 버리기 때문에 <대학>의 마지막 편에서는 이 두 가지를 신신당부하였다.

- <경세유표>    나라를 경영하는 제반 제도에 대해서 현재의 실행 가능 여부에 구애받지 않고 經을 세우고 紀를 나열하여 '우리의 오래된 나라를 새롭게 개혁해 보려는 생각'에서 저술한 책이다. 遺表는 다산 자신은 유배 사는 중죄인으로 나라에 개혁안을 올릴 자격도 없으니, 혹시 자신이 죽은 뒤에라도 옛날 신하가 죽은 뒤에 올리는 국가 정책 건의서라고 생각하라는 뜻에서 유표, 즉 유언으로 올리는 건의서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했다.

- <목민심서>    현재의 법을 토대로 해서 우리 백성을 돌봐 주자는 책이다. 고금의 이론을 찾아내고 간위(奸僞, 거짓되다 간, 속이다 위) 를 열어젖혀 목민관들에게 주어 백성 한 사람이라도 그 혜택을 입을 수 있게 했으면 하는 것이 내 뜻이었다.     다산은 목민관의 공렴을 강조하면서 목민관이 공렴을 실천해야 "자신의 몸이 바르면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행해지지만, 자신의 몸이 바르지 못하면 아무리 명령을 내려도 따르는 사람이 없다.(其身正 不令而行 其身不正 雖令不從, 기신정 불령이행 기신부정 수령부종)라는 공자 말씀대로 공무가 바르게 집행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아전들을 단속할 최고의 방법은 스스로 바르게 사는 것이고, 청렴해야만 아전을 단속할 수 있다고 했던 것이다. '청렴이라는 자기 내부의 인격 수양과 속리라는 외부의 실제 행정, 이 두 조항의 표리 관계가 제대로 되면 <목민심서>의 정신은 구현된다는 것이 다산의 뜻이었다.              목민관이 욕심쟁이면 탐관(貪官)이고, 아전이 썩으면 오리(汚吏)인데 이들 '탐관오리'들이 날뛰던 세상이 조선 후기였다.

- <해배>    18년의 길고 긴 유배살이를 끝으로 해배명령이 내려왔으니 8월의 일이다. 다산을 출발하여 9월 14일 비로소 고향에 돌아와 가족들과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 < 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는 다산의 둘째 아들인 정학유와 동갑내기로 정학유 등과도 어울려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했던 학자이자 예술가였다. 명문 경주 김씨 후예로 추사는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 참판에 이른 고관이었지만 제주도, 북청 등 변방에서 10년이 넘는 귀양살이를 했던 일이 있다.                   추사는 다산의 경전 주석 태도가 마땅하지 못함을 지적하기도 했다. 자신의 새로운 학설만 옳고 옛날 고주(古註)는 그르다고 여기는 태도는 경전 해석의 방법으로서 옳지 못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 점은 신 작, 홍석주, 김정희 등 당신의 큰 학자들이 공통으로 다산의 경전 연구 태도에 대해 표시했던 불만이다.

- <71세에 지은 시>    늙은이의 한 가지 통쾌한 일은      / 붓 가는 대로 아무 말이나 쓰는 것일세                                                                               어떤 운자에도 얽매이지 않고      / 퇴고를 더디해도 상관이 없네                                                                                             흥취 일어나면 바로 생각 굴리고 / 생각이 떠오르면 그대로 적는다네                                                                                       나는 조선 사람인지라               / 즐거이 조선 시를 짓는다네                                                                                                   그대는 마땅히 그대 법을 써야 하니 / 오활하다 비난 할 사람 그 누구리오   ......................................                                       배와 감귤 맛이 각기 다르나니      / 오직 자신이 즐기고 기뻐하면 될 일이네.

- <다산의 영면>   74년의 풍상의 세월은 끝이 났다. 75세의 연초부터 온갖 병환이 도져 신음하던 다산은 2월 19일에 이르러 정신이 맑아지고 기운을 조금 얻었다. 죽음이 가까워 옴을 예견이라도 했던 것처럼, 사흘 뒤에 다가 올 회혼의 날을 기념하는 시 한 편을 지어 자신의 일생을 정리하였다.

    <육십 년 풍상의 세월 눈 깜짝할 사이 흘러가   /      복사꽃 활짝 핀 봄 결혼하던 그해 같네                                                        살아 이별 죽어 이별이 늙음 재촉했으나         /      슬픔 짧고 기쁨 길었으니 임금님 은혜 감사해라                                         오늘 밤 목란사(木蘭詞)는 소리 더욱 다정하고 /    그 옛날 붉은 치마에 유묵 흔적 남아 있네                                                    쪼개졌다 다시 합한 것 그게 바로 우리 운명    /     한 쌍의 표주박 남겨 자손들에게 주노라                                                          -회근시- 1836년 부인과 결혼한 지 60년 되는 해

 - <성리학의 역사적 변천>      공자는 유교를 창시하여 후학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한나라의 경학자들에 의해 공자의 학문의 이론과 이론이 많이 밝혀졌으나, 당나라 때는 인도에서 들어온 불교로 인하여 유교가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다. 마침내 송나라에 이르러 정자, 주자 등에 의하여 유학이 성리학으로 발전하여 주자학으로 집대성되기에 이르렀다.                              우리 조선에는 고려 말엽에 주자학이 들어와 불교 국가이던 고려에서 유학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조선 왕조의 개국으로 성리학이 통치 이념이자 지배 논리로 자리 잡아 몇백 년 동안 왕좌를 유지하였다.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등은 대표적인 주자학자들이었으며, 그 후계자들도 모두 주자학을 중심 학문으로 삼았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고 병자호란까지 거치면서 국가의 문물제도가 무너지고 국가 재정까지 파탄나자,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탐관오리들이 판을 치며 망국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이러다가는 정말로 나라가 망하겠구나.'라고 생각하는 일군의 학자들이 나와 주자학의 큰 테두리는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조금씩 그와 다른 사유 체계의 실마리를 찾아내면서 새로운 학풍으로의 전환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 <다산의 운명>    1836년 음력 2월 22일(양력 4월 7일) 아침 8시쯤 75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이날은 15세의 나이로 16세의 홍씨 부인과 결혼식을 올린 지 60주년이 되는 회혼의 날이어서 가족, 친척, 제자들까지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하게 파란만장했던 일생을 마쳤다.

- <다산의 인생 회고>   <슬픔은 짧고, 기쁨은 길었다. 척단환장(戚短歡長)> 그처럼 고단했던 가시밭길 인생임에도 슬프던 때보다는 기쁜 때가 더 길었다니 성공한 삶이었다고 자평하였다.

- <다산 평가>    위당 정인보는 조선의 역사를 알려면 다산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성장과 쇠퇴, 존재와 망함을 알아보려면 다산의 학문을 통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의 학문은 바로 조선학의 보고라는 의미다. 조선의 온갖 사상과 학문이 다산학 속에 녹아 있다는 것이다.      2012년 유네스코에서는 기념해야 할 인물의 한 사람으로 다산 정약용을 선정했다. 다산이 자신의 호를 '사암(俟菴)- 기다릴 사, 책력 암'이라고 부른 본 뜻이 이제야 실현되기에 이르렀다. 먼 뒷날에 알아주고 이해해 줄 때가 올 것이니, '기다리면서 살아가겠노라'고 그는 확실하게 선언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