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에는 해저터널이 있다.
도천동에서 미수동으로 이어지는데, 여기에는 꽤나 깊은 역사적 사실이 있다.
첫번째는 '판데목'. 박경리선생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에 <판데>라는 지명이 나온다.
'판데' - 팠다는 말이다. 무엇으로 팠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팠던 곳이라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돌아가보면 임진왜란이 벌어졌던 1592년. 6월 2일.
당포해전이 있던 날.
이순신장군이 왜선 21척을 침몰시키고, 셀 수 없이 많은 왜군을 수몰시킨 날이다.
두산백과에 보면 당포해전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1592년(선조 25) 5월 29일부터 6월 1일 아침까지 전라좌수영의 이순신(李舜臣) 함대를 주축으로 한 조선 연합수군은 사천포해전을 통해 왜군 함선 13척을 격침시키고, 왜군 2,600여 명을 사살하였다. 같은 날 정오 무렵 이순신 함대 전선 23척과 원균(元均)이 이끄는 경상우수영 전선 3척은 삼천포(三千浦) 앞바다를 거쳐 사량도(蛇梁島)에 이르러 이곳에서 밤을 보냈다.
다음날 오전 8시 척후선으로부터 당포 선창에 왜선이 정박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순신 함대는 곧 당포(지금의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 앞바다로 나아갔다. 당포 선창에는 왜군 대선 9척, 중선·소선 12척이 매어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배에는 붉은 일산이 세워져 있고, 장막 안에는 왜장 카메이 코레노리[龜井玆矩]가 앉아 있었다.
아군 함대가 접근하자 왜군은 조총을 쏘며 맞섰다. 아군은 개의치 않고 거북선을 앞세워 현자총통을 비롯한 천자·지자총통을 쏘아 대는 한편, 뱃머리로는 왜장선을 들이받으며 격파하였다. 이어 화포와 화살을 왜장선에 집중적으로 발사하였다. 이 와중에 왜장은 중위장 권준(權俊)이 쏜 화살에 맞아 쓰러졌고, 첨사(僉使) 김완(金完)과 군관 진무성(陳武晟)이 적선에 올라 적장의 목을 베었다. 왜장 카메이 코레노리가 죽자, 왜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육지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왜선 21척은 모두 격침되었고, 많은 수의 왜군이 사망하였는데 정확한 수를 파악하기 어렵다. 이순신 함대가 제2차 출전에서 사천포해전에 이어 치른 두 번째 해전이다. 옥포·합포·적진포해전 등 제1차 출전까지 합하면 다섯 번째 해전이 된다. 적정과 지형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거북선을 앞세워 적의 대장선에 화력을 집중하는 이순신의 치밀한 전략이 돋보인 해전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당포해전 [唐浦海戰] (두산백과)에서 펌.
통영 해저터널의 유래는 이러하다.
첫번째는 1592년 당포해전에서 유래한 '판데'라는 지명이 나온다.
두번째는 1757년 영조 33년, '굴량교'라는 나무다리를 설치해 미륵도까지 건너 다녔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나무다리는 태풍이나 자연적인 재해로 자주 무너졌고 무너지면 다시 놓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세번째는 1915년 '착량교'라는 돌다리를 통영의 부호이며 향장이기도 한 김삼주가 통영 성벽을 헐어내 무지개형태의 돌다리로 세웠다. 이에 대한 고마움을 다리 양쪽의 주민들이 송덕비를 세웠는데, 현재 충무교 남단에 세워져 있다.
네번째는 1932년 일본인들이 해저터널을 팠다는 사실이다. 왜 50미터도 채 되지 않을 만큼 좁은 곳에 건설하기 편한 다리를 세우지 않고, 해저터널을 팠을까?
여기에는 일본인들의 아픈 과거와 연관되어 있다. 임진왜란 당포해전에서 많은 왜군이 사망했다. 이들은 현재의 해저터널이 위치한 지형이 밀물이면 바다가 되고 썰물이 되면 개펄이 드러나 육지와 연결된다는 사실을 몰랐다. 이순신장군의 거북선이 공격해 오고, 왜장 카메이 코레노리마저 죽자 당황한 왜군은 그들이 부산에서 건너올때 지났던 판데목을 파서 배가 지날 수 있도록 하여 도망가려고 했으나 전멸 당했다. 세월이 흘러 일제강점기가 되어 일본인들에게 아픈 역사적 기억이 있는, 일본인들 조상들이 전사해 묻힌 장소 위를 한국인들이 다리를 놓고 넘어 다닌다는 것이 탐탁치 않았던 일본인들이 위로 다닐 수는 없게 하고 그 아래로 다니게 하자는 생각으로 판 곳이 해저터널이다.
다섯번째로 1967년 우리나라는 해저터널 위로 충무교를 세워 당포해전에서 전사한 왜군들이 묻힌 장소를 우리가 다시 위로 넘어서 다니게 되었다.
서호시장을 지나 윤이상 기념공원에서 보면 12시 방향으로 해저터널 입구가 보인다.
60년대에 보았던 구옥들이 아직도 존재한다.
좌측으로 바다 건너가 미륵도인 미수동이고 터널 앞은 도천동.
터널 위에 씌여진 '용문달양'이라는 글은
해저터널 건설 당시 통영군수였던 야마구찌의 자작휘호.
'용문달양'은 중국 고사에 나오는 '물살이 센 여울목으로, 잉어가 여기를 오르면 용이 된다'는 말이라고 한다.
아픈 역사든 부끄러운 과거든 감추려고 하면 안된다.
아프고 부끄러운 과거를 살펴 다시는 겪지 않도록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아마도 용문달양은 당포해전에서 전멸당한 왜군들의 위령이 용으로 승천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야마구찌가 썼겠지만
우리에게는 일제강점기를 다시는 겪지 않겠다는 살아있는 교훈이 되고 있으니 오히려 고마운 일이 아니겠는가?
왜병들의 위령이 묻힌 곳이라며 위로 다닐 수 없으니 아래로 다니라고 일제강점기시절 해저터널을 팠지만,
지금은 이렇게 우리가 충무교를 통해 당당하게 그 위를 밟으며 다니고 있다.
해저터널도 들어가는 입구.
해저터널은 길이 483미터, 폭이 5미터, 높이는 3.5미터이다.
해저터널 가장 하단부 벽면에는 해저터널 공사 당시의 자료사진이 있다.
터널을 건너 미륵도로 넘어와 미수동 입구에서 본 터널의 모습.
좌측 통영밥상식당의 해물탕은 추천할 만하다.
60은 넘은 듯한 부부가 운영하는데 그날 준비한 재료가 떨어지면 문을 닫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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